▲ 김수우 시인 |
또 하나의 새 계단을 딛는 아이들과, 아니 그의 부모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게 있다. 자유이다. 그 자유를 꿈꾸는 방식이다.
새 출발을 앞둔 아이들은 봄빛 그 자체이며 희망 그 자체, 미래 그 자체이다. 또한 자유와 도전 그 자체이다. 그 생명의 내부에서 뻗치는 빛은 강렬하다. 그러나 푸른 반짝임은 이내 불투명해진다. 아이들은 곧 학교의 일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시험과 시험 사이에 갇힐 것이며, 모든 여유를 학원문 앞에서 서성거리게 될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고 지켜온 아름다운 단어, 자유. 그건 우리를 펄럭이게 하는 깃발이 아니던가. 자유는 자연적이고 본질적이며, 강인한 만큼 위태롭기도 하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고, 개인의 역사가 아니던가. 그 자유의지를 잃은 학생들을 보는 것만큼 슬픈 현실은 없다. 꽃다발을 든 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성적의 노예로 만들고 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들을 판단하지 말자. 아이들에게 선택하게 하자.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자.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보여주자. 그래야만 우리 사회에 진정한 미래가 오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유와 영원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먹고살기 위해 공부하는 삶에, 그 사회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인간은 자기다울 때 가장 행복하다.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과 투쟁하게 하고, 꿈의 세계를 일구게 하자. 스스로 확신하는 법을 체득하게 하고, 거기서 다시 자신을 창조해내는 기쁨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부모의 숙제가 아닐까. 아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을 빨리 배우게 되리라.
가장 자기다운 가치를 얻기 위해선 자신의 일을 자신이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에겐 두 손과 두 발이 있다.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것.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훈련, 그 과정이 자기를 자기답게 완성하는 방식이 된다.
방을 대신 청소해주고 교복을 다려주면서 시험지와 문제집 속으로만 밀어 넣으면 아이는 무엇을 익히게 될까. 경쟁과 복종뿐. 오로지 길들여질 뿐이다. 그 눈부신 아이들을 나약한 소시민으로 키우고 말 것인가. 사회적 구조를 탓하기엔 아이들은 너무 찬란하고 소중한 보석이 아닌가.
아이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가슴 한쪽이 저리더라도, 오늘부터 이불을 개어주지 말고, 제 교복 제가 다리게 해야하지 않을까. 제 이불을 갤 줄 모르는 아이는 그 어떤 성적을 획득하더라도 미래를 꾸려나갈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의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자유는 앎을 실천하는 삶에서 나오며, 자율적인 인간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용감한 부모가 되면 어떨까. 혈연에 기댄 관계가 아닌 인격적 존경을 받는 부모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그 존엄한 관계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눈부신 꽃다발을 보면서 간절해지는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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