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그 용이 어떤 의미이든 상관없다. 내가 나답다는 게, 세상에서 '무엇'답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경제통인 김진표 교육부총리가 용다운 용이 될 수 있을까?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도 제각각인데, 솔직한 속내는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상황 이미지를 감안해서 미래산업에 맞는 휴먼캐피털을 길러내리라는 건 기대요, 교육의 시장화에 휘둘릴지 모른다는 건 걱정의 큰 줄기다.
결국 타깃은 방향성과 지속성에 모아져 있다. 한쪽에선 실용주의니 혁신이니 하는 군불을 열심히 지펴 보지만 어째 '돌려 막기' 인사 같고 어딘지 실험적이다. 하긴 동종교배(순종)보다 이종교배(잡종)가 낫다는 경쟁력 강화의 시각으로는 괜찮을 수도 있다. 뒷받침할 논리는 얼마든 있다. 가령 대통령의 "전문성에 벽을 쌓아두면 동종교배로 퇴화현상"이라는 논리….
교육계의 불신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에는 문외한이다. 경제부총리 시절에 이런저런 일들로 교육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기업과 경제계 요구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또 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화답도 그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요인에 추가됐다.
그러나 용인불의(用人不疑)라 했듯이 사람을 쓰면 일단 의심하지 않는 게 정석이다. 뽑을 땐 심사숙고하고 뽑았으면 믿고 맡겨야 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교육계 인사만이 그 자리를 맡는다는 주장은 독선일 수 있다. 실용주의적 사고 또는 산업 마인드가 반드시 비교육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그래서 결과는 어느 쪽도 점치기 힘든 상황이다.
남달리 우리는 교육이 산업으로 거듭난다는 명제에 알레르기가 심하다. 벌써 웬만한 나라의 교육 화두인데 홧홧 달아오른 뉴스가 된다. "밖에 나가 보니 기업이 국가더라"도 역시 뉴스다. 교육은 차세대 서비스산업이고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한다, 따위는 일부 선진국에서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사회주의국가라는 중국마저 사립학교 규제를 풀었던 바 있다.
이걸 모르면 우리가 애써 흐름에 눈감고 자기중심적(ego-centric)이었다는 증거다. 경제는 국내총생산으로나 교역규모로나 세계 10위권이면서 교육은 하위권 취급받는 것은 장작도 못 팰 황금도끼를 꼬나 들고 폼만 쟀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 사이,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주 멀찍이 달아난 게 아닐까?
그렇다고 현장주의적 노하우를 무시한 채 경제라는 과실이 열린 항구로만 직항하려는 나머지 과정이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잘 접목한 교육과 경제의 융합 비즈니스일지라도 그것이 교육의 성과물로서 나타날 때 효율은 극대화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경제 논리에만 종속되어 교육이 떠밀리면 외려 경쟁력을 해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교육적 원리에 따라야 한다. 교육은 교육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어떤 가능성을 교육의 중심에 수태시키는 이종교배 과정에서 맞닥뜨릴지 모를 과오로 인한 리스크를 교육 전체가 분담해서는 안 된다. 정부 수립 후 배출된 48명의 교육부장관들이 그걸 침묵으로 말해준다. 역사는 교훈을 배우지 않는 자를 벌한다는 얘기.
이런 비유를 해본다. 오리는 늘 뒤뚱거린다. 헤엄칠 수도 날 수도 있지만 어설프고 심지어 걷는 것조차 변변치 못하다. 교육과 경제를 동시에 추구하다가도 이처럼 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육부총리가 전문가를 잘 지휘하는 리더로 남기 바란다. 용이 되려거든 이무기는 말고 용다운 용이 되는 게 좋을 것이다. 진짜 용이 있고 가짜 용이 있다. 어떤 의미의 용이건 상관없다고 앞에서 썼다. 용용용용(龍龍龍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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