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두실 때 가장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영적인 존재로 살게 하셨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관계의 구조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비로소 성장하기 시작한다.
무인도에 표류했던 로빈슨 크루소는 옷을 벗고 살든 입고 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신 이외의 사람이 없는 곳에는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이 있기에 관계가 시작된다. 우리 중에 이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서가 마비된 사람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영혼의 문빗장이 굳게 걸려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제 인간의 영혼이 부드러워지는가?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접촉할 때이다. 사랑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창조주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창조주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성경에서는 그 사랑을 가리켜 ‘십자가 사랑’이라고 한다. 새로운 생명을 주려고 신적 생명을 드린 사랑이다.
유한한 죄인을 넉넉하게 품어내는 사랑에 접촉하지 않으면 인간의 내면은 황무지로 전락한다. 황폐한 영혼에서는 어떠한 창조적인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자신과 타인을 병들게 하는 독소만 뿜어 나올 뿐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웰빙은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굳어버린 영혼의 소유자 탈옥수 신창원은 2년6개월 동안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다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2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수감생활중이다. 그런데 그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참회의 글을 썼다.
“제가 만난 재소자들 중에 90퍼센트가 부모의 정을 받지 못했거나 가정폭력, 또는 무관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면 사춘기 때 비로소 행동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도소를 아무리 많이 짓고 경찰을 늘려도 범죄는 줄지 않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면 범죄는 자연히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사랑결핍증에 걸린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호화궁전에 살면서도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옥 속에 살아도 시인의 가슴으로 사는 인생도 있다.
문제는 그 영혼에 거룩한 사랑이 공급되는가이다. 존재자체를 고양시키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건강한 자존감을 높이는 따뜻한 배려와 용납이다. 사랑 받아 영혼이 부드러워지고, 영혼에 물기가 오른 사람은 사랑의 유통자로 설 수 있다.
기독교의 힘은 사랑의 힘이다. 퍼내어도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 사랑의 능력이다. 만약에 기독교에서 사랑을 제거해버린다면 기독교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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