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우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우리말은 최근 자신의 의견과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데 많은 괴리를 보이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자기 독단에 빠져든 나머지 자신의 의견이 남과 다를 수 있는 ‘주관’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객관적 사실을 부인’하는 쪽으로 쉽게 몰아친다는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달 뒤인 며칠 전, 우리나라의 일간신문 여러 곳에서 우리말의 오염을 걱정하는 특집들이 일제히 게재되었다. 지면 중 가장 중요한 1면에 수록된 이들 기사에 의하면 -이제는 우리말 인식체계의 변화를 염려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도대체 무슨 말이며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는 ‘외계어’들이 인터넷을 장악하면서 한글파괴가 맹렬하게 번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신언어들의 축약화와 변환현상은 인터넷의 보급이 확산될 때 어느 정도 미리 짐작이 가능한 일이긴 했었다. 통신시간이 돈과 직결되는 정보화시대에 어떻게 해서라도 글자치는 시간을 줄여 비용을 절약해보려는 노력은, 걍(그냥) 젤(제일) 안냐세요(안녕하세요)를 넘어 ㄱㅅ(감사) ㅎㅎ(하하)등으로 뻗어나갔을 때 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요 일간지의 지면에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외계어’의 일부로 예를 든 것을 보면, -’읍ㅎ℉ㅁ1てつ효’ 라는 정체불명의 글을 ‘오빠멋져요’로 읽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 낯설음에서 ‘방가방가’나 ‘추카추카’하고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자횡포에 해당한다.
실제로 중고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터넷 작가들의 글을 읽노라면 과도한 이모티콘 -즉, 채팅용어와 문자들이 특이하게 부호화 되어 있어 이제는 이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이 없으면 아예 글의 뜻을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실정이다.
그 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걱정하는 ‘외계어’에는 한글의 특수문자와 한자어에다가 일어까지 포함 되어,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자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신기함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낙관론자들은 이런 현상이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 국한되고 아직까지는 그들만의 소통수단에 머물러 있으므로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구와 이에 딸린 누리꾼들의 숫자가 얼마인가를 계산해보면 그냥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현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이쯤되고 보면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이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른 것을 두고, 그들이 고유문자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져가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가벼이 들을 얘기가 아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를 위시한 여러 나라들이 자기네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고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로 소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일제치하 36년’ 극복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은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이렇듯 준엄한 역사를 통해 칼날처럼 우리 앞에 입증되고 있지 않는가.
다행스럽게도 근래 ‘국립국어원’에서는 우리말 지키기의 한 방편으로 ‘모두가 함께 하는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벌여,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다듬어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네티즌(누리꾼) 미션(중요업무) 방카슈랑스(은행연계보험) 블로그(누리사랑방) 올인(다걸기) 유비쿼터스(두루누리) 웰빙(참살이) 콘텐츠(꾸밈정보) 파이팅(아자) 포스트잇(붙임쪽지)처럼 무심결에 즐겨 사용하던 여러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도록 권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파이팅을 대신하는 ‘아자!’처럼 벌써 우리 혀끝에 밀착해가는 말들도 있다.
이런 현상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어차피 같은 모습으로 정지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무분별한 언어의 바이러스가 확산된다면 ―나중에는 ‘자신의 의견과 객관적인 사실’을 소통할 수 있는 우리말 고유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우리말을 아끼고 지키자는 ‘모두가 함께 하는 우리말 다듬기 운동’의 정신이 젊은 누리꾼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뻗어나가 우리말의 긍지를 살리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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