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통계치가 없을 뿐 우리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모래시계’를 시작으로 조폭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한지 오래다. 이들은 대체로 폭력을 멋있고 의로운 행위로 묘사한다. 덕분에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 무렵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1순위로 ‘조폭’이 꼽힌 어이없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폭력장면과 같은 TV 내용이 어린이의 자아형성에 미치는 악영향은 흔히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어린이들은 TV의 특정 장면을 보고 그 행위를 모방하는 속성이 있다. TV에서 본 슈퍼맨을 흉내내다 아파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어린이나 뉴스에서 보도한 범죄수법을 실제로 재연한 학생 등이 그 생생한 사례다.
둘째, TV에서 방영된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실제 생활에서 이에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살상은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TV 화면을 타고 전해지는 총성과 울부짖음, 공포를 반복해서 접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별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셋째, TV 폭력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실제의 현실세계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툭 하면 치고 받고,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TV 속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사람은 물리적 힘이 능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자연스레 현실은 힘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어쩌면 TV의 특정 장면이 문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TV를 보는 시간만큼 더 소중한 무엇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족들 간의 소통시간,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 ‘침묵을 채우는 방법’이다. 실제로 TV를 시청함으로써 저녁 식사시간 이후 집안에서 노는 우리 아이들이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든다. 더 많은 친구들과 더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도 적어진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의 관찰이 새삼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그는 TV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어버리고 화면만을 응시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곤 성격과 능력을 성장하게 해주는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와 교류의 기회가 차단됨으로써 TV가 켜지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은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다.
TV를 안보는 가정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8일에는 ‘TV 안 보기 시민모임’이 결성되었다. 누구든 자기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길 바란다. 그래야 이들이 주역이 될 지역과 사회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 집안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TV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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