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배 서울주재 정치부장 |
지난해 말 국회에서 과거사 진상기본법이 통과됐고, 광복 60주년을 맞는 새해 벽두부터 한일과거사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리라는 짐작도 있었다. 학계로부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역사적 현장고증이 새롭게 제기됐고 정부도 ‘행정의 투명성 증대’와 ‘국민의 알권리 충족’이라는 배경에서 30년 넘는 외교문서를 잇따라 공개하고 나섰다. 그리고 지난 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과 65년 완결된 한일협정 문서가 동시에 공개됐다.
이를 계기로 근·현대에 걸친 한일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압박도 점차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JP가 곤혹스런 처지에 놓인 것도 13년 동안이나 지속됐던 이 한일협정 마무리와 협상의 막후 주역의 위치 때문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사이에 이뤄진 ‘김-오히라 메모’로 사실상 마침표를 찍는다. 7억달러를 요구한 한국과 7000만달러가 상한선이라고 주장한 일본과 협상끝에 김-오히라는 이 청구권 금액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타결 지었다.
다만 이 금액은 추후 협상과정에 상업차관 부분만 ‘3억달러’로 최종 조정됐다. 그러나 경제협력으로 일괄 해결하게 된 경위와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협상 중간단계 자료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김-오히라 메모는 이미 공개됐지만 그 ‘협상 막후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사실 한일협정 문제는 그 후에도 시시때때로 40여년 JP정치의 발목을 잡아왔다. 각 대학캠퍼스를 돌며 한일협정 반대시위(6·3사태)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대토론회를 갖는가 하면, 희생양이 되어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JP 자신은 ‘김-오히라 메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민련 총재 시절 그는 “제2의 이완용이 될 각오로, 국가적 신념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1960년대 초반 우리는 조국근대화를 해야 했으나 돈은 한푼도 없었다”면서 “그 시대에는 한일협정의 논리와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1997년 ‘DJP정권’ 당시 또 한번 맞은 총리 재직시절 일본 방문을 앞두고 오히라와 협상했던 과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 3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청년 JP는 오히라를 만나서 일본의 3대 명장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리더십을 비교하면서 “나는 히데요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 명장의 성격과 리더십은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게 하는 방법으로 비유되고 있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리고,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오히라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DJ시절 총리 JP는 “나는 목을 비틀어서라도 새를 울게 해서 조국근대화를 이룩해야 했다”면서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하는 한국과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일본이 의기투합한 것이 바로 김-오히라 메모였다”라고 회상했다.
JP의 자평과 변론을 떠나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등 일본 배상금을 받은 국가들 가운데 다른 나라들이 호텔을 지을 때 포철과 고속도로를 건설했던 한국이 가장 잘 쓴 것으로 평가했다. 근대화의 주춧돌로 인정한 셈이다. 역사는 역사로서 억지와 아픔을 남기지 않고 규명돼야 한다. 이제 그 뒷마무리는 그만한 경제적 볼륨을 갖춘 정부의 몫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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