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우칼럼]과수원을 나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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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우칼럼]과수원을 나온 사람들

  • 승인 2005-01-17 00:00
  • 칼럼니스트. 前 국장칼럼니스트. 前 국장
나는 구름재를 기어오르는 산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농촌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 도시로 떠났다. 거기에 누군가 농사보다 나은 일자리를 알아줄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라하게나마 자리잡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더러 있어 어떻게 되겠지 하고 한 노릇이었는데 결국 교외로 떨어진 과수원에서 일자리를 붙들었다.

수입이라야 당장은 더 나을게 없었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을 도회지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슬슬 둥지를 틀다보니 차츰 요령도 생기고 길도 밝아져서 1년이 지나고 나서는 비록 변두리지만 전셋집 하나를 마련하게 됐다. 물려받은 전답을 보태서 마련한 전셋집일망정 가족을 합솔해 상머리에 앉은 아버지는 매우 만족해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비슷한 길을 걸어 들어온 애들이 많아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시내에서 이쪽으로 밀려난 애도 있었고, 멀리 서울까지 올라갔다 미끄러져 내려온 녀석도 있었다. 학교 성적이 웬만하고 또 가까이 오는 놈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들은 나를 따랐고, 나도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해서는 꽤 여럿이 되어 몰려다녔지만 서울 명문대학에는 나를 포함해서 두서너명이 들어갔고 나머지는 대개 본바닥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그럴 수 없는 녀석들은 일찌감치 직공이나 점원으로 여기저기 일자리를 얻게 되어 서로 뜨악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방학이 되어 내려가면 옛친구들끼리는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다. 내가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도 나와 어울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회적 거리가 장래의 보수 또는 명예로 구체화되자 내가 그들을 원하고 있음으로 해서만 가지고 서로를 녹여 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늘 추억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안간힘을 다하여 우리들의 우정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래서 되도록 서울얘기, 직장 얘기를 피하려 했지만 말머리가 미끄러지듯 그리로 빠져들고 있었다. 서울대와 지방대의 예상진로, 대졸과 고졸의 임금격차, 관리직과 생산직의 실질적 임금차이, 서로 다른 작업장 분위기, 소음, 에어컨, 쉴 틈 없는 일거리, 소위 노동조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의존관계, 그로 인한 중소기업의 기아 이윤, 잘나가는 기업 첨단산업에 들어야 고임금된다는 것. 저임금은 언제 고임금되며, 안 그러면 귀족노동만 잘 살게 되는가. 재벌기업의 중견사원이 된 나는 약육강식을 악덕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변명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제 그 옛날 단칸방에서 시시덕거리던 동무들, 사회에 나와서도 격의없이 만나려고 애쓰던 친구들, 어떤 경우라도 갈라서지 말자고 다짐했던 우정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우린 이해관계나 인식의 차원에서 벌써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군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느니, 고도 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느니, 발전단계를 밟아야 한다느니, 선진국도 한때 그랬다느니, 결국 생산성의 문제라느니 하는 관변나팔을 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형평이라든가, 분배라고 하면 피를 나눈 형제끼리도 눈에 불을 켜고 대드는 세상 아닌가. 누구에게 양보를 받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소년시설 과수원에서 떠올렸던 꿈은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과수원에는 무더기 무더기로 다른 과일나무가 있었지만 한 나무에 이 모든 과일을 주렁주렁 열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꿈이었다. 국민 각자의 능력을 교육을 통해 평준화하고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공평히 하며, 그 성과에 따라 보수가 매겨지는 사회를 그리게끔 자라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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