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제야(除夜)의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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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제야(除夜)의 세시풍속

  • 승인 2004-12-31 00:00
  • 최태호 목원대 교수최태호 목원대 교수
한 해의 끝 12월 말일을 대그믐(大晦日)이라 하고 이날 밤을 제야(除夜) 또는 제석(除夕)이라고 한다. 이날은 지난 일년을 최종 마무리하고 새해 설맞이 준비를 하면서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이때의 세시풍속 또한 다양하였다.

우선 연중의 거래 관계는 이날로 대청산을 한다. 각 집에서는 설 준비에다가 채권 채무의 정리 등으로 긴장 속에 종일토록 분주하다. 밤중까지도 채권의 독촉으로 돌아다니는데 밤 11시경이 지나면 정월 상순까지는 결코 빚독촉을 하지 않는 것이 예라고 하였다.

이날에는 또 세찬과 제수음식을 마련하느라 집집마다 부산하다. 설날 세배 온 사람에게 내는 음식을 세찬이라고 하지만, 세밑에 보내는 세찬거리를 또 세찬이라고 한다. 설명절을 당하여 사람들은 평소 신세를 입은 사람이나 친지 어른들께 세찬을 보낸다. 세찬은 제사가 있는 집과 없는 집, 또는 부유하고 가난한 형편에 따라 그 차이가 현격하였다. 특히 엄동설한에 당하는 가난한 집 설맞이는 ‘서러워서 설이라고 한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또한 저녁이 되면 가묘에 예배한 다음 친척이나 지인 사이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날 세배하듯 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묵은세배 또는 구세배(舊歲拜)라고 한다. 주로 중류 이상의 민간에서 행하는 풍속이었는데, 일년의 마지막 순간에 이 한 해를 무사히 지내게 된 데 대한 인사를 겸하여 세찬을 드리는 것이다. 조선시대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이날 거리에는 저녁 때부터 밤 늦게까지 묵은세배 드리는 사람들이 왕래하느라 제등의 행렬이 끊임 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날 밤에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국 방방곡곡의 집집에서는 집 안팎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고 밤새도록 환하게 등불을 켜놓는다. 그리고 남녀노소 함께 닭이 울 때까지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데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이날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한다. 갑자기 수명이 감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밤 늦도록 윷놀이, 옛날이야기, 얘기책읽기 등 흥미 있는 놀이를 하면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혹 잠을 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흰가루를 묻혀 두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썹이 셌다고 놀려 준다. 부뚜막 솥 뒤에도 불을 밝히는데, 부엌의 조왕신(王神)은 섣달 스무닷새날 말미를 받아 천제에게 가서 그 집안의 일년 동안 일을 모조리 보고하고 그믐날밤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엌을 밝혀 조왕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한편으로 여기에는 조왕신이 출입하는 것을 감시하며 은근히 압박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대개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훨씬 많으므로 이로 인하여 천제로부터 받을 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제야의 세시풍속 중에서도 특히 구세배와 수세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그 의의를 되새겨 음미해 볼 만하다. 구세배는 세배라는 명분을 세우면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세찬을 마련해 줌으로써 드러나지 않게 선행을 베푼다는 데에 그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설 명절을 당하여 소외된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한 선인들의 따스한 온정이 깃들인 미풍양속이 아닐 수 없다. 수세의 풍습 역시 집안을 밝히듯이 마음의 등불을 밝혀 스스로를 살피고 반성하여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죄과를 천제에게 보고하고 돌아오는 조왕신에게 뒤늦게 경의를 표하거나 압력을 가해 보았자 그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다.

또다시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모두가 건강하고 복된 삶을 기원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나 좋은 음식을 탐하기보다 부지런히 선행을 쌓고 죄짓지 않는 생활을 통한 정신건강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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