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과학자가 바라본 행복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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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과학자가 바라본 행복의 단상

  • 승인 2004-12-28 00:00
  • 강태원 박사강태원 박사
강태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자기표준부 전자파그룹 박사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그러지 말자고 하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딸아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2 년 전 영국에서 나와 아내가 오페라를 보려고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런던에 다녀올 때 딸아이는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무척 궁금해 했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는 카를로타 머리 위로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무서운 이야기’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 오페라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아내와 나는 28파운드나 하는 CD를 한 장 샀었다.

얼마 전 수통골 빈계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이라고 해 봐야 소나무가 빼곡히 서 있고, 그 가운데에 등산객들이 소원을 빌며 하나둘 쌓아 올린 돌탑이 있다. 조금 아래쪽에는 편평하여 앉아서 휴식하기에 좋아 보이는 무덤이 있었는데 등산복 차림의 부부가 바닥의 넓적한 바위에 앉아 점심요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의 모습은 마치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젊은 연인들, 크리스틴과 라울처럼 잘 어울렸다.
부부가 대화를 하던 중 검은 등산복을 입은 남편이 말했다.

“잔디만 입히면 아주 명당자리인데….” 그러고 보니 무덤 옆은 꽤 깊이 패어 있었다.
그 때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셨다. 그는 마침 정상에 올라온 아는 아저씨를 만나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며 “여긴 옛날 미군 통신대 자리였는디 지금은 저 쪽으로 옮겨 갔제”하며 역사의 산 증인인양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겨울의 쓸쓸한 풍경 때문이었을까. 산의 정상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의 모습이 추운 겨울 오페라극장의 무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두 주인공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오페라의 유령이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틴을 끌어안으며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하는 라울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말이다. 이 두 연인이 함께 부르는 ‘All I ask of You’의 가사처럼 영원히 함께하고픈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달라는 것 그것뿐이라는 이들의 고백이 이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듯했다. 나 역시 그 무대위에 서 있는 배우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버렸다.

오페라의 유령은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팬텀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얼굴을 지녔다는 이유로 괴물로 취급받아야 했고, 결국엔 살인을 저지르고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숨어 살게 된다. 그에게는 예술의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오페라극장의 무용수 크리스틴을 향한 사랑은 아름다운 음악선율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까지 이어지고 결국 크리스틴에게 거부당하고 만다.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는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오페라의 유령이 안타깝게 울부짖는 소리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나름의 매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평범한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 세간의 화제 거리가 되지는 않더라도, 날마다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이 내게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여러 모습의 등산객들이 무덤 앞의 작은 무대에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등 뒤의 서늘한 겨울바람을 느끼며 나는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겨울무대를 내려오며,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오페라의 유령’ 원작을 쓴 가스통 르루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현실에서는 비극적인 사랑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행복한 삶을 마음 속 깊이 열망하지 않았을까? 오르던 산길의 솔잎 사이로 보이던 파란 겨울하늘에는 어느덧 옅은 회색구름이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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