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세이]충청인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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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에세이]충청인의 명예

  • 승인 2004-12-21 00:00
  • 김세영 前목요언론인클럽 회장김세영 前목요언론인클럽 회장
지난여름 어쩌다 강원도 설악산 등산길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 틈에 끼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산을 올랐습니다. 헌재판결 직후라 필자가 충청도 사람이란 것을 알자 자연스레 행정수도로 화제가 옮아가더군요. 그중에 뜨끔한 한 마디가 있어 잊지 않고 있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이 이번에 행정수도 이전으로 한 몫 단단히 챙길 줄 알았을 것” 이란 이야기였습니다.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긴다는 말에 멍청하게 속아 표를 던져주었지만 또 멍청도가 되었다는 비아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했습니다. “YS, DJ 정권에서 그렇게 이용당하고서도 또 당하느냐?”

그로부터 또 몇 달이 지났습니다. 요즘 충청도 사는 사람이 서울 가서 충청도 출신 서울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행정수도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 수도가 정말 충청도로 갈 것 같은가?”, “충청도 땅값과 집값이 무지하게 올랐다며?” 그래도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에는 못 듣던 신조어까지 씁니다. “멍남도 사람은 몰라. 그런데 요즘은 멍북도 사람들도 덩달아 뛴다며?” 멍남도는 충남도, 멍북도는 충북도를 가리키는 신조어랍니다. 충성 충(忠)자가 멍텅구리 ‘멍’자로 바뀐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망신을 또 당하다니요. 난데없는 행정수도로 충신열사의 고장이 멍텅구리들이 사는 땅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충청도 사람들은 ‘행정수도’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작 충청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집권하거나 전라도 사람들이 집권하거나 아무소리 없이 세금 잘 내고 아들 군대 잘 보내고 군소리 없이 살았습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언제 수도를 충청도로 옮겨 달라고 했습니까? 공연히 자기네들끼리 옮긴다 못 옮긴다 아우성치는 가운데 돌아 온 것은 행정수도 아닌 멍청도 뿐이더군요.

헌재 판결 이후 우리가 잃은 것은 행정수도 보다 충청인의 명예였습니다. 행정수도가 충청도로 옮겨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정부가 지켜야 하지만, 충청도인의 명예는 충청도인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이제는 남의 뒷바라지나 하는 충청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 충청도 사람들 개개인은 남의 질문에 궁색한 답변 찾기를 그만두고 “우리가 언제 수도를 옮겨달라고 했느냐 ?”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각계각층 단체들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질하는 데모도 좋지만, 충청도 사람 개개인이 온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공세적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는 것이 적합하다면 그것은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일뿐더러, 한 번 결정한 문제라면 약속대로 차질없이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충청도 사람들은 그동안 오래 동안 실추되었던 충신 열사의 고장 충청도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충청도의 명예가 이대로 주저앉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동안 충청도가 이렇게 비하된 배경에는 충청도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60~70년대 ‘핫바지’이후 붙여진 충청도의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충청인들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되는 경우 아낌없이 협력하는 충청도의 미덕도 좋지만, 그 이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먼저 추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청도가 캐스팅보트를 쥐었다며 역대정권에 협력을 했다가 얻은 것은 ‘핫바지’나 ‘멍청도’라는 불명예 밖에 더 있습니까. 이제는 순박한 충청인들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충청도의 의지를 당당히 펼치는 능동적인 충청도인으로 거듭나야 되겠습니다. 충성 충(忠)자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줄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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