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불구의 몸에 가난까지 겹쳐 절망상태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스승을 잘 만나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교단에 서게 됐고 아주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고 있다. 부모를 잘 만나 호강을 하며 유복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친구를 잘못 만나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늪에 빠진 이도 있다. 그 모든 일들이 만남이란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만남의 광장이다. 그 속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슬픈 사연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 사상가 말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만남의 관계를 나와 너의 만남, 나와 그것의 만남으로 이해한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진실의 만남을 ‘나와 너의 만남’이라 하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라할지라도 진실이 결여됐거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로서의 만남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라고 한다. 나와 너는 인격적 관계이고 나와 그것은 사물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사는 만남으로 시작하고 또 새로운 만남으로 시와 종이 있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나와 너의 만남의 광장으로 만들어가는 선량으로 나타날 때, 이 세상에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만남은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이라하겠다. 사람이 만났다가 서로 헤어진 후에도 그 만남이 그의 생애 속에 계속 이어지는 만남, 그것이 진정한 만남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정이 있고 생의 미가 있고 삶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아름다운 만남의 미담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중고의 여인 헬렌 켈러의 이야기이다. 그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한다. 그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가정교사들이 왔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마지막에 설리반여사가 가정교사로 왔다. 그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각고 끝에 헬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보게 하였다. 감각에 의한 마음의 눈과 귀와 혀로 말이다. 헬렌 켈러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안아 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설리반과 헬렌의 만남이야말로 사랑이 교차하는 인격적 만남이었으며 그것이 곧 나와 너의 만남인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숭고한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다. 가장 고결한 참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사랑이다. 그 외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참사랑을 보여주었다.
인간 고뇌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만나야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그를 만난다면 인간의 궁극적인 죄와 사망 그리고 절망과 고독에서 해방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되고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나와 너의 만남으로 만나주는 인격적인 신이시다.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만나야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실체로 만나주는 만남의 주체가 되어야한다. 그러면 이 세상이 더 아름다운 만남의 광장으로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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