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헌법재판소에서 심판을 받았고, 마침내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사법권자들은 그 위헌의 근거로 ‘관습’을 제기했다. 법을 죽인(행정수도이전을 반대하는) 의원들은 자축했고, 이해 관련 세인들은 성문법의 나라에서 웬 관습헌법이냐고 길길이 뛰며 난리들을 부린다.
그러나 성문법을 논할 것도 없이 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최고의 법이 ‘정의’가 아닌 ‘관습’을 심판의 잣대로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법을 만든 자들이 어떤 믿음으로, 왜 사법권자들에게 법(신행정수도 관련)의 살육을 의뢰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관습이란 무엇인가. 관습은 곧 기득권과 상통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마침내 합법적으로 기득권의 편에 선 것이다. 이것이 법치국가의 죽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본래부터 우리의 법이 오롯이 정의의 편에만 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상풍파 겪은 사람 치고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법정서’가 어쩌고 ‘법감정’이 어쩌고 할 때 보면, 법이 정서이고, 감정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서와 감정으로부터 수혜를 받는 자와 피해를 입는 자는 누구일까 라는 궁금증도 있었을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양심과 양식(良識)의 최소치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정서니 감정이니 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다시 말해 법이 경우에 따라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있는 자, 가진 자는 조금만 다쳐도 데미지가 엄청 크고, 쥐뿔도 없는 자, 낮은 곳에 있는 자는 엄청 다쳐도 데미지 입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일종의 ‘기만적 논리’이다.
법이 제대로 서고 지켜진다 한들 세상의 도덕과 양심이 죽은 사회는 썩은 사회이다. 법은 최소의 형상을 갖추는 인간 세상의 틀이다. 그런데 이 틀이 무너지면 어찌될 것인가. 법의 죽음은 곧 도덕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법이 죽은 사회에서는 도덕이 살 수 없다. 이는 도덕이 죽었을 때 비로소 법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도덕은 죽었는가. 만약 이 시대의 도덕이 죽었다면 위헌 판결은 살 것이요, 관습과 기득권이 대한민국을 영원히 지배할 것이다.
관습을 굳이 법으로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네 세상은 이미 많이 어지럽다. 얼마 전 입시문제를 놓고 다툰 교육계에서는 같은 선생들(대학)이 선생(고교)을 못 믿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이른바 내신 부풀리기 관행을 다 안다는 것이다. 아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을 선생이 못 믿겠다면 도대체 어찌 된 세상인가.
이 모두가 잘못된 관행이 굳어 관습이 된 탓이다. 이것들도 이제 관습으로 굳어졌음으로 모두 법으로 보호해 줄 작정인가. 아니면, 관습에도 좋은 관습과 나쁜 관습이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 법은 앞으로 정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을 심판하는 법으로 다시 태어날 작정인가.
법치주의 국가의 최대 백미는 법을 법으로 심판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4대 법안’도 법으로 심판하여 끝장을 볼 것인가.
현재는 법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관습의 기득권자’들이 지배하고, 미래는 관행에 젖은, 그리하여 자기들끼리도 믿지 못하고, 마침내 그 누구도 믿어주지 못해 평가의 권한도 얻지 못하는 자들이 길러낸 젊은이들이 지배하게 된다는 말인가. 눈 있는 자들은 보아라! 지금 구천을 떠도는 신행정수도법이 헌법에게 길동무하자며 꼬드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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