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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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내? 자식?

  • 승인 2004-10-26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지구가 종말을 맞았는데 새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우주선에 당신은 한 명만을 더 태울 수 있다. 어머니, 아내, 자식 중 누구를 택하겠는가?"

이 난처한 질문은 엊그제 어느 대기업 계열사의 면접시험에 출제된 문제다. 출제된 배경은 무엇일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국가나 개인에게나 지극히 어려운 선택인 우선순위의 가치관을 선택하라는 문제인 성싶다. 수험생이라면 어머니, 아내, 자식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단답형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이유에 대한 논리, 즉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해서 해결하겠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설득력 있게 밝히면 높은 점수를 얻을 것이다. 시험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이처럼 둘 중 하나만을, 더욱더 긴급함에 직면해 꼭 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우선순위는 그때그때 상황윤리에 맡겨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얼마 전에 필자의 팬을 자처하는 한 여성으로부터 이와 아주 흡사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질문은 어머니와 아내가 먼저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는 것. 팬이었기 망정이지 아내라도 불쑥 "시어머니랑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거냐"고 정색을 하고 묻는다면 어쩔 뻔했는가. 또 어머니가 "네 마누라하고 이 어미가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냐?"라고 묻기라도 하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독자 여러분도 여러 가지로 입장을 바꿔 자문자답해 보기 바란다. 요즘 남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겉으로는 아내, 속으로는 어머니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먼저 구할 수 있는 사람부터 구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핵심을 교묘히 비껴가기 위한 군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만약 아내가 어머니가 함께 있는 자리라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어머니 먼저 구하고, 저는 물에 떠내려가는 아내를 따라가겠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섭다. 이 한 몸 죽더라도 둘 다 구하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섭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얘기는 농담으로라도 거론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에게서 사회적 안정을, 어머니에게서는 정서적 안정을 얻었다. 그러나 고부간에는 이런 균형과 안정의 장치가 전무했다. 그 시절, 오직 하나 참고 또 참으며 시어머니가 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라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그 시절이라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어머니부터 구한다고 했을 것이다.

우리 전통으로 볼 때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면 ①조상의 신주, ②노부모, ③족보, ④아들, ⑤딸의 순이었다. 실제로 열행록(烈行錄)에는 불이 났을 때 조상의 신주(神主)를 꺼내려다가 타죽은 사람이 나온다. 이런 얘기도 전해져 온다. 병자호란 때다. 가족을 납치당한 강해수라는 사람이 돈을 이리저리 꾸어서 중국 심양 땅에 갔다.

납치된 가족은 어머니, 아들, 동생이었는데 박박 긁어 모은 돈으로는 둘밖에 구할 수 없었다. 한데 막상 가서 보니 그 사이를 기다려 주지 않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들, 그리고 신주를 지니고 있는 동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신주를 귀히 모신다는 걸 알아차린 중국인들은 어머니의 신주까지 한 사람 몫으로 쳐서 몸값을 요구하는 거였다.

다시 문제다. 강해수는 누구를 선택했을까?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주와 동생을 택했고, 사랑하는 아들은 제외시켰다. 지금 세상이라면 모르긴 해도 아들이 0순위이고 동생이 그 다음일 것이다. 조선시대야 마땅히 나를 나로 있게 해 준 조상이 제일의(第一義)였으나 이 세상이라면 그 정당성 내지 도덕성을 공인받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말이다. 사랑이 섹스가 되고 인정이 돈이 되는 이 세상, 사랑이 자유일 수도 있고 집착일 수도 있는 이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우선순위별로 다이어리에 메모해 밑줄을 긋고 다녔던 벤자민 프랭클린도 이 경우라면 쩔쩔맸을 것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할 테지만 범인(凡人)에게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인생 앞에 이러한 골치 아픈 선택지가 없다면 행복이란 감정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생명이 유한하기에, 선택이 유한하기에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을 잘 아는 것,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자,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기로 한다. 스스로 수험생이라고 가정하고 신중히 대답해 보기 바란다.
"지구가 종말을 맞았는데 새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우주선에 당신은 한 명만을 더 태울 수 있다. 어머니, 아내, 자식 중 누구를 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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