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선생은 한말 개화기인 1879년, 당시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를 지낸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종5품의 벼슬을 지낸 한응준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마치고 16세에 출가(出家)하여 백담사 오세암에서 불법에 관한 경전을 통독하고 한 평생을 불가적 사상에 민족주의적 사상을 접목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한결같이 치열하게 살다가신 민족의 스승이시다.
선생은 불가적 사상에 바탕을 둔 시문학을 통하여 민족자존과 자주독립에 진력하셨으며 강인한 의지와 절개로 일제와의 기(氣)싸움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은 그야말로 ‘한국의 간디'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와 같은 행적은 3·1독립선언서의 행동강령인 ‘공약3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의 정신으로 광명정대한 행동질서를 유지하며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을 강조하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가득차 있다.
또한 3년이란 긴 세월 옥고를 치르시면서도 “사식을 넣지 말라, 변호사를 대지 말라, 보석을 신청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하셨으며 만해선생의 옥중 변론서라 할 수 있는 ‘대한독립의 서’에서도 조선독립의 동기와 조선독립선언의 이유를 밝히면서 민족자존과 서구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이 오롯이 담겨있는 것만 보아도 이 분이 얼마나 탁월한 독립사상가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우리의 역사가 암울하였던 한말 개화기에 태어나시어 청년시절에는 동학운동에 앞장 서셨고 불가에 귀의한 후부터는 불교문학을 통한 민족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셨으며 3·1독립만세운동의 여파로 옥고를 치르면서 조국의 자주독립과 조국광복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불살라 오시다가 끝내 조국광복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하시고 해방직전 해인 1944년 심우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시고 말았으니 그 여한이 오죽하였으랴!
그러나 선생의 60주기를 맞는 오늘, 선생께서 평생 동안 지니셨던 위대한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과 강인한 민족자존의 독립사상은 세월이 가도 영원히 식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면면히 흐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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