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에 문학인들의 심사를 심난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김없이 실망감으로 다가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관한 발표 내용이다. 올해는 독일어권의 좌파 페미니스트 작가 엘리프데 옐리네크(오스트리아·58)가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녀가 추구해온 문학 세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실상과 그에 대한 굴종의 역사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옐리네크는 실험성이 강할 뿐 아니라 시적이면서도 산문적인 문체로도 정평이 나 있으며,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요소가 적극적으로 가미된 독특한 문학 작품을 쓰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외국의 작가들에 비해 치열한 실험 정신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장르 넘나들기에도 인색한 우리나라 문인들이 한번쯤 참조해볼 만한 점이다.
나는 옐리네크의 수상 자체에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노벨상을 타기에 충분한 자격과 용기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피아니스트’(메하엘 하네케 감독, 2001년)라는 영화를 통해서 먼저 접하고, 그것이 옐리네크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그 주제의 강렬함과 독특함에 감동을 했던 기억만으로도 그녀는 분명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작가들은 왜, 아직도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없는 것일까? 수상자가 될 만한 작가가 없어서? 아니면 한국어의 국제적 인지도가 빈약해서? 아니면 한국의 국력이 미약해서? 그것도 아니면 서구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심사 과정이 불공정해서? 글쎄,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다. 비록 그런 요소들이 어느 정도 고려된다고 해도 수상자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방향 설정의 오류다. ‘내것’의 세계화가 아닌 ‘세계것’의 ‘내것’ 만들기에만 치중해온 결과는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국내의 적잖은 작가들은 국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춘 작품들을 내놓고 있는데, 그것들을 세계화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것이 우리의 문학 현실이다. 특히 국내의 수많은 번역가들과 외국어문학 전공자들이 그런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 그 첫걸음은 우리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읽히는 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학 작품 가운데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불과 몇 작품이나 될는지 의문이다. 간혹 도서전시회의 한 구석에 나와 있는 외국어로 번역된 우리 작품들을 보면 번역 솜씨나 편집술, 디자인 등이 유치하고 조악하기 그지없다.
문인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노벨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을 특별 초청하여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안타깝고 유감스런 일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