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그렇다. 현금지급기 부스와 신에게 자신의 신용도를 불안스레 묻는 고해소(告解所)의 풍경은 피장파장이다. 지난 이틀 간의 국정감사 자료대로라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실상의 신용불량자를 포함해서 480만명으로 늘려 잡을 수 있는 부류는 아예 그 앞에 설 자격마저 박탈당한다.
이 경우, 백화점 카드나 통신료 연체까지 합산하긴 했어도 경제활동인구 5명 중 1명이 고해소 근처에 얼씬거릴 수조차 없다면, 그 주범이 신용카드라면, 신용 없는 신용카드를 경기부양의 이름으로 포장한 현실을 티스롱이 다시 해석하면 어떡할까. 그 대열에 끼지는 않았지만 카드 여러 개로 열심히 돌려 막기를 거듭하는, 시지프스 신화처럼 피곤한 삶에는 또 뭐라고 토를 달까.
그러다 아차 싶은 순간에 돌덩이 같은 빚 덩어리를 감당 못하면 고해소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은행의 VIP고객들이었던 집창촌 업주들도 마이너스대출과 현금서비스를 이용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나빠졌다. 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후의 변화다. 카드업계는 비상이다. 성매매 인구를 100만명으로 잡고 이들 상당수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지 않을지 우려하는 희한한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누구든 적당히 고백하고 대충 사면받는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사원장 말을 따면 카드대란은 “분수 모른 국민” 탓이기도 하다. 드물게는 사은품 전동 칫솔의 유혹으로 길거리에서 만든 카드가 나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성년자와 죽은 사람에게도 카드가 발급될 정도라니 옛적 조선시대의 삼정문란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
도식으로 정리하면 DJ가 YS로부터 외환위기를 상속받았고 현 정부는 DJ로부터 신용카드 위기를 상속받았다. 그 과정에서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카드사를 전당포처럼 만든 데 대해 시장이 복수를 한 것이다. 카드 대란의 다른 줄기는 바로 국감을 나란히 치른 재경부와 금감위, 금감원의 감독 시스템의 복잡성에도 있다. 관(官)은 치(治)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상대적이지만 그나마 글로벌 관점의 경제 전반은 외환위기 때에 비해 꽤 양호하다(pretty good). 어딘가에 돈도 굴러다닌다. 문제는 치솟는 유가와 장마철에 식수난 겪는다 하듯 텅 비어버린 소비 계층의 호주머니다. 만일 100조원을 헤아리는 신용불량자 대출금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으로 이어지면 제2, 제3의 위기상황을 막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걱정은 걱정에 그치도록 하고, 호미로 못 막으면 가래로라도 막아야 한다. 잘못된 부양책은 더 큰 수렁을 만든다. 소비가 견인하는 경제가 선진경제라고 떵떵거리며 세금공제에 복권까지 걸어 신용카드 붐을 일으키려던 그 시절이 반면교사다. 신용불량자에, 숨어 있는 신용불량자가 부채 부담을 키우고 청년실업과 파트타임 직종은 늘어만 간다. 딱히 이 시점에서 좌편향·우편향인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권도 소중하고 이념도 좋지만 성장 동력을 키워 잘살게 하는 일도 진보의 목표여야 한다.
결론도 세르주 티스롱 식이다. 고해소 안에서는 모두 죄 사(赦)함을 받는다. 합당한 형식을 갖춰 용서를 구하면 일단 그러리라 믿는다. 고해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도 사회적 존재 자체를 위협받거나 믿음을 버리게는 말아야 한다. 신용불량자들이 너도나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해소에 들를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 날은 아마 배드뱅크를 굿뱅크로 만드는 날일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