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근 서울 소재 일부 사립대학의 대입전형 고교 등급제 논란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일부 계층이 주장하고 있는 평등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분배의 평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상당한 모순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평등주의도 문제지만 교육 및 사회경쟁력의 하향 평등으로 흐르고 있어 역사의 교훈을 통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1910년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당대에 날카롭게 집어낸 인물은 독일 역사학자 슈펭글러였다. 그것은 바로 ‘서구의 몰락'이었다. 그는 최강의 역사와 문명국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순환론을 제기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은바 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논리를 주시하며 자국의 힘을 유지 발전시키고자 안간힘을 써야 했고, 국가발전을 꿈꾸는 나라에겐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을 갖게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우리가 존중하게 된 민주적 원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 사회주의적 실천사항들도 아직 전면 폐기될 때가 아니며, 동북아시아 이 땅에서는 유럽의 제3의 길인 경제통합이니 하는 공동체형성 노력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사회적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불확실성을 만나면 확실성을 높이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정보도 수집하고, 분석도 내리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주술이 풀려버린 시점에서 기존 방법은 더 이상 먹히질 않는다. 그래서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며 ‘파괴-창조'의 논리로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있다. 그 이면에 나름대로 사상과 철학, 세계관과 역사인식이 담겨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행위가 역사 흐름으로 정착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문민정부 때의 역사바로세우기처럼 정치적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편리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겉으로는 사회주의 논리를 펼치는 이중적 작태가 정치권에서 세력화하면서 여론의 여과를 거치지 못한 채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아주 훌륭하다. 더욱 훌륭한 일은 하향 평등을 경계하면서 그들과 함께 나눌 열매를 키우는 일이다.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이 얼마나 사회의 병폐가 되었는가는 지나간 역사가 이미 심판을 내린바 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은 여전히 경제발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국민 전체의 ‘근대적 규율화'는 성공하지 못했고, 국민과 엘리트 사이의 사회적 신뢰는 희박해져 가고 있다. 2004년 한국이 겪는 위기에 대한 대처방식은 정권이건 엘리트건 일반 시민이건 결국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어떤 사회문제가 지속될 경우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원칙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기회의 균등을 위해 노력하되 원칙에 근거하여 사회구성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차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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