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명절을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 섰다. 오십 줄을 들어서는 가을에 연구원 문턱을 넘나들길 이십년이 되고 보니 만월이 걸린 식당 옆 은사시나무가 무지하게 커진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바이오에너지를 연구하느라 미생물을 키워 보니 이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잘도 자라고 죽어 가는데, 나까지 세월을 잊고 살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여느 중년남자들처럼 왠지 모를 허전함과 회한에 잠기는 것은 과학자의 도리가 아닌 것도 같지만 나 역시 과학기술자이기 전에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느 산업체에 근무하는 분이 인터넷에 투고한 글을 보니, 연구단지 과학기술자들의 ‘신선놀음’에 정부가 돈을 너무 많이 주어서 벤처기업 지원이 잘 안된단다. 대덕 R&D 특구 지정과 관련하여 산·학·연 협조체계를 강구하는 의견수렴 과정에서 나온 얘기였다. 과학기술계의 자기 역할에 대한 홍보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신선놀음’이면 어떻고, ‘좌선수도’면 또 어떻겠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안타까운 마음을 다독거리기 힘든 것은 나이가 들어서 노여움이 많아서인가 싶기도 하다.
세상만사 어렵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출연연구소에 근무하는 과학기술자로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가 힘들었었다. 첫째는 나의 일로서 주어진 과제가 언제나 새롭고, 그 정답을 모른채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내가 알아내고 개발한 것이 실생활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거나 기여를 했음에도 크게 표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셋째는 연구만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실험실에서 ‘신선놀음’을 하는 줄 알고, 나 자신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게 되더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연구개발의 속성인 신규 독창성, 실용화 가능성, 자연현상에 바탕을 둔 순수 과학성을 추구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들이 되겠다.
물론 출연연구기관의 연구개발 과정이나 결과를 모든 국민들에게 세세히 알리고, 모든 산업현장에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무슨 내용을 연구하는가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이니 따라서 개발의 과정에서는 그 자체가 기밀일 수 있다. 둘째는 산업기술 개발은 특정업체와의 공동연구로 이루어지므로 모든 산업체와 관련기술을 공유할 수는 없고 혜택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연구비는 연구비중 인건비 비중이 너무 낮아서 각종 다양하고 많은 전문 인력이 소요되는 산업기술을 턴키로 개발하여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출연연 연구원들이 자아도취에 빠져서 ‘신선놀음’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폄하하는 것은 산·학·연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우리도 우리를 알리기에 더욱 힘써야 하겠지만 국민들과 산업일꾼들도 이러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싶다.
‘안분수기(安分守己)’라 하였던가?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를 지켜나가라는 말인데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자기 분수를 알기는 참으로 어렵고, 과학기술자로서 자기의 품성과 직분을 지켜나가기는 더욱 어렵다는 생각에 가을의 늦은 저녁 연구실 창밖의 한가위 둥근 달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또 단풍이 물들고, 스산한 바람에 낙엽이 지겠구나. 군에 있는 내 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작은 소망 한 가지를 빌어볼까?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미생물을 벗하여 숨 거두는 그 날까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이들이 우리 아들딸들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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