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순택 논설위원 |
함석헌 선생이 쓴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이 글 한 편이 준 충격은 아직도 가끔 신선하게 떠오르는데,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그것이다. 스스로도 "나더러 말이 밉다 곱다 말고, 글에 조리가 있으니 없으니 말라"한 선생이니 글투는 따지지 말자. 거침없고 걸쭉한 문장이라야 선생답다.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됐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 도리어 전보다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인 것이다.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우리나라 시대 시대의 정치업자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백성을 짜먹으려만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런 허튼 수작들을 버리고 깨끗이 지난 잘못을 회개하여 진정으로 나라 위해 일하라.… 국민전체가 회개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에서 울음으로 하는 회개말고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여야 할 것이다."
선생의 글을 길다 싶게 인용한 것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추석이 가깝기 때문이고, 이 땅 위정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외침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백성들을 짜먹으려 들지 말고 진정으로 나라 위해 일하고, 제발 백성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명절민심'이라는 게 있다.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민족대이동을 통해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어촌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순식간에 하나의 민심이 만들어진다. 바닥민심을 알려면 명절민심만한게 없다. 이번 추석, 추석 연휴기간만이라도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위정자라면 대강 어떤 이야기가 들릴지 감을 잡고 있을 것이다. 택시 운전기사부터 재래시장이 장사꾼은 물론이고 몇년만에 보는 친척들까지 하나같이 "경기가 나쁘다. 살기 너무 힘들다"고 입을 모을 것이다. "경제가 이꼴인데 왜 싸움박질만 하는가"고 할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경제살리기부터 해야지 지금 새삼스레 옛날 일을 들춰서 뭣하나? 그 시절에 친일파 아닌 사람 어딨나? 국보법 폐지가 그리 급한가하고 따질 것이다. 모든 잘못은 결국 대통령에게 떠 넘겨지고, 우리가 뽑은 우리 대통령에 대한 적나라한 적대감에 마음이 선득 추워질지도 모른다. 바닥민심이 흉흉하다고 해서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당 태종이 메뚜기 먹듯 해야 한다. 가뭄에 메뚜기까지 창궐하자 태종은 몸소 메뚜기 잡이에 나섰다. "백성이 굶주리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 네게 생각이 있다면 나의 마음을 파먹고 백성이 먹을 곡식은 먹지 말라." 그러면서 잡은 메뚜기를 삼키려 했다. 병을 얻을까 염려한 신하들이 막아서자, 태종은 "차라리 나에게 재앙이 오고 백성에게는 재앙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는 병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마음의 한 자락이라도 우리 위정자들이 가졌으면 하는 것이고,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최대한 많이 듣고 가슴에 새겨 국정에 반영하길 바라는 것이다. 국민들은 나라 걱정하기에 지쳐 있다. 지금 민심은 함석헌 선생의 글 맨 끝 문구와 대강 같다. 그 문구는 "하느님, 이 땅을 불쌍히 여기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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