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으로서 학급을 위해 성실히 봉사할 수 있는 학생을 추천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탁 바로 앞에 앉은 혁이가 손을 들었다. 과연 누구를 추천할 것인지 궁금해하던 찰나에 혁이는 자신을 추천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반장을 못해봤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꼭 반장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녀석의 추천 사유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10년 넘게 담임을 해왔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혁이의 추천이 끝나자 다른 아이들도 몇 명의 후보자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총 4명의 후보자가 결정되었고, 반장의 자질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견 발표 순서가 되었다. 한사람씩 발표를 마치고 드디어 혁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약간은 수줍은 듯 어렵사리 교단에 올라선 혁이는 “물론 저도 염치가 없는 줄은 알고 있지만 여러분이 뽑아주신다면 담임 선생님을 도와 정말 열심히 학급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드디어 개표가 시작됐다. 한 사람씩 후보자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아이들은 환호와 탄식을 쏟아냈다. 결과는 혁이가 아슬아슬하게 세 명의 후보를 물리치고 반장에 당선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한 학기 동안 혁이는 정말 열심히 반장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내년이면 고 3이 되는 동료들을 잘 다독거려 활기찬 학급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선생님들의 칭찬도 이어졌다. 아이들의 태도뿐만아니라 수업 반응도 좋아 가르치는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치르는 시험마다 일등은 당연히 우리반의 차지였다.
그렇게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다시 학급을 이끌어갈 반장 선거가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은 혁이에게로 모아졌다. 그러나 혁이는 자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친구들이 혁이를 추천했다. 혁이는 지난 학기 동안 처음으로 반장을 맡아 소원을 풀었다며, 이번에는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급우들이 혁이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양보하겠다는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난 학기와는 달리 강제적(?)으로 반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지금도 혁이를 보고 있노라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해보고 싶던 반장의 역할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혁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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