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기인 것은 정치이지 세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정치가 우리네 사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지, 우리네 국민들이 세상을 위기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국민의 뜻밖에서 일을 저질러놓고 국민의 등뒤에 숨어 마치 국민의 뜻인 양 왜곡하고 호도한다.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순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 모순을 이용하려 한다. 또한 그들은 대상과 사물의 양면적 가치를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하여 이기와 혼돈을 챙긴다. 이 모두가 선과 정의와 공익이 뒷방신세가 된 때문이다. 선과 정의와 공익이 수단이고, 정치적 이해득실이 목적이다.
옳은 정치란 본래 지금처럼 골머리 아픈 게임이 아니다. 본래의 것을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고, 본래의 것에 본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산이 산이 되고, 물이 물이 되어야 말이 되는 것이지, 산인지 물인지를 놓고 우기고 헷갈리면 더 이상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의미와 가치 전도가 우리네 정치판의 일상이 되다보니,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전염이 된 듯하다. 정치를 질책하고, 심판하고, 가르치다가도 정치인들이 몇 차례 뒤넘이질을 하면 그때부터는 국민들도 이들 정치인들의 논리적 오류와 사익, 정파적 이해관계 등을 모두 잊고 각자 편가르기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정치는 이벤트이다. 놀라움이 있고, 흥미가 있고, 상식을 뛰어넘는 반전이 있다. 이 이벤트에 국민은 관객으로 참석한다. 정치인들은 이 관객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격과 자극을 가한다. 선과 정의와 공익만으로는 관객들의 반응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색깔론, 과거지사, 원색적 비방 등이 현란한 불빛을 번쩍인다.
그렇다면 우리네 국민은 아직도 쇼를 원하는 것인가. 물론 더 이상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옛날 쇼가 흥행하던 시절의 향수를 되살려 보고자하는 정치집단들의 집요한 노력이 가상해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일 게다.
누가 지금 우리네 정치를 보며 나라와 민족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을 이끈다는 정치가 세상은 이미 모두 바뀌었는데, 오롯이 과거의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공허한 호령을 일삼고 있다. 누가 이들의 호령을 듣는가. 누가 이들의 쇼를 보는가.
듣는 자 없고, 보는 자 없으면 호령도 쇼도 막을 내린다. 보고 듣는 자가 있어 아직도 이들은 호령할 수 있고, 공연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이를 홍보하고, 지식인들이 이들을 편들어 평한다. 이른바 정치가 쇼를 하면 언론과 지식인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정치가 정치를 하는지 쇼를 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쇼를 홍보하거나 평하면 안 된다.
정치를 홍보하고 정치를 평하라. 정치가 땅을 더럽혔다면, 하늘만이라도 깨끗해야 이를 보고 살 것이 아닌가. 정치가 땅을 더럽히고 그릇된 언론과 지식인이 하늘마저 더럽힌다면 희망이 없다. 그러니 언론과 지식인은 선과 정의와 공익의 눈으로 국민 속에서 정치를 보고, 정치를 권좌가 아닌 국민의 것으로 돌리는 일에 힘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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