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의 길을 접고 대학 강단의 길을 들어선 게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길은 아니고 정처 없이 떠도는 길도 아니지만, 사실상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Prost)의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을 걷는 셈이다.
논산 가는 길은 그동안 공직에서 업무차 가끔 다녔던 곳으로, 새롭지 않은 길을 새롭게 가고 있다. 매일 오가는 장소가 되고 보니, 길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된다. 길가에서 만나는 나무 한 그루, 코스모스 한 송이조차 한번도 같은 적이 없다. 그 속에 묻힌 역사와 민속 인물과 휴머니즘까지 소롯이 돋아난다.
대전 도심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아홉 개의 봉우리가 제각기 멋을 자랑하는 구봉산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 지방 출신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이 구봉산 단풍을 보고 ‘한바탕 펼친 붉은 비단(一張紅錦)’이라고 읊었던 시구가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망막에 그려진 구봉산 잔영이 사라지기 전에 계룡산 천왕봉이 웅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백두대간 중 금남정맥(錦南靜脈)의 끝 부분인 계룡산은 멀리 보아도 신비롭고 수려하다. 일년 전 탄생한 계룡시가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이 새롭게 보여 진다.
조선 초 문인 서거정의 계룡 찬가를 음미하기도 전에 넓은 논산 평야가 시야를 가득 채워준다. 평범하고 소박한 비산비야(非山非野)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이 길을 굳이 ‘자연의 길’ 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처럼 논산으로 가는 길에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풍부한 농산물과 특산품이 깔려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연산 오골계, 연산 대추, 논산 딸기, 논산쌀… 풍년이 들어도 시름을 지워내지 못하는 농심이 안타깝지만 이름하여 ‘풍요의 길’ 이라고 불러도 무색하지 않다.
계룡산 옛 궁궐터를 비롯해서 돈암 서원쯤 가면 생각이 더욱 커진다. 단순히 문화유적을 바라보는 소극적 덕목에서 뭔가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적극적 덕목을 찾게 된다.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沙溪) 김장생 선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 우암(尤庵)송시열, 명재(明齋) 윤증선생의 선비 정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정치. 사회상을 돌아보며 옛 선비들께서 무슨 메시지를 주실 수 있을까? 청빈 정신, 서릿발 같은 기개, 일관된 지조와 그 속에 간직한 여유로움, 탁월한 자기 제어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은 파고 들수록 새롭고 맑은 느낌이다.
고려 왕조 창건의 기반을 이루었던 개태사, 쌍계사, 은진미륵으로 이름난 관촉사도 각기 보석처럼 소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지나가는 이 길을 스스로 ‘문화 유적의 길’이라고 작명 해 본다.
다음으로 이 길가에는 국방의 요람지인 계룡대가 입지하고 있다. 요즘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고 걱정들이지만, 이 곳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든든하고 믿음직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지역처럼 자연지리, 역사지리, 인문지리, 문화지리 측면에서 독특한 곳도 많지 않을게다. 장소 판촉(place - making) 문화 판촉(culture - making)이 강조되는 시기에, 이 길가는 더 없이 좋은 소재이고 자원이며 자랑거리다. 자연이 아름답다, 전통이 아름답다, 산물이 풍요롭다, 군(軍)이 힘차다… 생각에 젖은 사이 어느새 ‘대학의 길’ 로 들어선다. 대학문을 넘어서면 젊음의 길, 희망의 길, 미래의 길이 활짝 열린다. 건양 대학이 이곳에 입지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이와 같은 ‘자연의 길’, ‘풍요의 길’, ‘문화유적의 길’, ‘군사의 길’, ‘대학의 길’ 속에서, 내 삶의 길은 어떠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까? 길지 않은 궤적이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길을 말없이 투영해 보고 조명도 해 본다. 삶은 결국 길에서 시작되어 길에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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