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전체주의를 반(反)정치로 규정하며 개개인의 자유 실현을 정치 공동체의 요건으로 규정한 한나 아렌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 세대들이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말 것을 도올이 충고한 부분에서였다. 그가 9·11 테러를 말하는 그 순간에 러시아에서는 엄청난 테러 희생자들이 실려나가는 비극이 재연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언론 물을 잠깐 먹은 도올도 언론인 출신이다. 그런 그가 언론은 엄마 품과 같아야 한다고 응석 같은 이상을 말하는 사이, 필자는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고 있어야 했다. 검객과 논객은 흡사하다. 무딘 칼로 남의 초식이나 흉내내다간 배겨나기 힘든 생리는 그도 잘 알 것이다. 어찌어찌 괴발개발 버티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도….
어쭙잖게도 필자는 논어를 악보 없이 읽어도 랩이 되는 것쯤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어 도올과의 교감의 폭이 조금은 넓은 편이다. 어떻든 공연이 돋보인 것은 치열한 가수정신이나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꼬일 대로 꼬인 나라안팎 사정과 그럭저럭 보색효과를 누린 것으로도 여겨진다. 이번 이벤트가 언더냐 오버그라운드냐를 떠나 메시지를 던져준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콘서트에서 쏟아낸 말들이 생산적인지 냉소적인지는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다. 한 가지만 말하면 '곰나루뜰 미호 금강에 새 세상을 개벽하소'라고까지 도올이 새 수도를 예찬한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한량없이 고맙고 든든하다. 우리가 못 보는 어둠이 빛일 수 있다는 다원주의로의 희망만 건져도 입장료의 대가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대든다는 자체가 미성숙을 깨고 성숙사회로 전이되는 증거다. 한국적 현실에서 용공과 반공은 뭐가 다르냐고 따지는 것엔 일리가 있다. 친일파가 뒤집어쓴 탈이 무엇이던가. 반공과 용공 아니었나. 바로 사람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려서 죽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였다. 국보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자는 대통령, 대척점에서 국보법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라는 야당, 누군가가 집단심리의 원형인 그 무시무시한 침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 봐도 그렇고, 종종 여야 관계는 N극과 S극으로 이뤄진 자석과 같다. 자르고 또 잘라도 자른 부분에 극이 형성되는 자석 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전인권도 보라. '에∼'를 곧잘 붙이는 쇳소리 강의를 광적인 일렉트릭 기타 소리에 비유하며 친밀감을 과시하고 있다. 도올은 좋게 보면 그런 자성을 지녔다.
그 경계를 침범하는 자유를 필자는 저서에서 징검다리 구실이라고 쓴 적이 있다. 돌의 속성을 잊고 물결에 맞서 길로 변신해 건너고 싶도록 유혹하는 징검다리를 말함이다. 이번에는 도올의 징검다리 역을 "똥을 잘 싸자"라는, 결코 부박하지만은 않은 결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쌀 것은 깨끗이 싸고 새로 잘먹자는 것.
그가 다음달 3일 순회공연에서 대전시민들마저 '해탈'시키겠다 벼르고 있다. 도올의 데뷔곡(?)을 다시 들으며 이제 문화를 말할 때 전적(全的)인 인간의 흐름을 살펴야 한다고 조심스레 동의하게 된다.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는 논어의 정신을 녹여 휴식처럼 편안하게 공연을 봐야겠다. 즐거운, 락(樂) 콘서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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