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파트 후문 입구에는 못 보던 천막이 하나 들어섰습니다. 50대 초반의 부부 한쌍이 고구마며 팟단 호박 양파 등 채소류를 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며칠 새 별로 팔리는 기색을 보지 못 했습니다. 어제는 두 부부가 도시락을 내 놓고 점심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 부부는 아직은 절망스럽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기차를 타러 대전역에 나가보면 노숙자들이 눈에 띕니다. 노숙자들의 모습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거지요.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뛰어보자는 이야기는 요즘에는 TV나 신문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더군요. 아마 그것보다 더 급한 일들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얼핏 들으니 아파트 문 앞의 그 천막 가게 주인은 얼마 전까지 괜찮은 직장에 있었다는 겁니다. 20여 년 가까이 몸담아 왔던 직장이 문을 닫고 중국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고 합니다. 생각다 못해 처음 해보는 채소장사를 시작했다고 하데요.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그의 새 삶이 잘 풀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지만 그의 새 삶이 순탄하게 잘 풀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채소 한 단에서도 단 몇 푼이라도 빼고 싶어하는 주부들과의 거래에서 쉽게 성공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네 모서리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에서는 건물 세 좀 놓아달라는 사람은 많은데 입주할 사람을 찾지 못 해 울상이라고 합니다. 건물마다 임대 현수막을 몇 달씩 내 걸고 있지만 방을 빌려 달라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겁니다. 은행 빚을 지고 건물을 지은 사람들은 이번 연말쯤에는 무더기 차압을 면치 못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돕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학생이나 어른이나 애들이나 너도나도 10여장씩 카드를 지갑 가득히 넣고 다니도록 하고 대량의 신용불량자를 만들어 낸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얼마 전 이 문제의 책임을 둘러싸고 몇 사람이 갑론을박하더니 요즘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 졌습니다. 카드 빚 때문에 빚어진 우리사회의 그늘을 누가 지워줄지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군요. 카드빚의 비극은 불행히도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말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우리 남은 인생 이런 여름을 몇 번 더 만날까 생각해 보았느냐? 신문방송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내 말은 이만하고 남은 이야기는 지금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는 나무한테 듣기 바란다”고 하며 법문을 마쳤다고 합니다.
영문학자 피천득씨의 수필 신춘에서 “신문 3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리지만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이른 아침 정동거리에는 뺨이 붉은 어린이들과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두 분 다 정치와는 무관한, 7, 80을 넘긴 우리 사회의 지성들입니다. 찜통더위에도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는 나무를 보고 우리는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을 보아야 하고 그리고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은 데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토스카니니는 누구며, 우리는 또한 플루트를 멋지게 불고 있는지 이 가을 생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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