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경쟁력강화를 통한 경제회복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미국이 새로운 차원의 교육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미국의 초중등교육은 폭력과 마약, 소수민족 교육에 있어서의 불균형, 직업교육의 퇴행 등 문제점을 보여 왔다.
미국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신(新)교육운동’의 초점을 초중등교육과 직업교육에 맞추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대학들은 이미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인재들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창의력과 사고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속도로 세계를 이끌어가는, 최고수준의 미국 대학교육은 바로 국가경쟁력의 원천이다.
최근 현재 중3학생부터 적용되는 새로운 대입제도가 발표되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겪는 일이라서 별반 느낌은 없지만 우리의 교육현실은 국가가 제도를 통해 개선책을 모색하기에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한책임의 자녀교육관을 당연시하는 사회풍토에서는 백약이 무효인 듯하다. 제도권 교육과 사교육이 충돌하는 현 상황에서는 기적만을 기다리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과연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개인의 의식변화 없이는 난맥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보통 가정에서는 자녀의 16세 생일을 아주 뜻 깊은 날로 여겨 의식에 가까운 생일파티를 해준다. 정장차림도 시키고 남녀 친구가 있으면 정식으로 초대해 부모에게 소개하도록 한다. 16세의 생일이 지나면 부모의 보증으로 자동차 운전면허도 받을 수 있다. 가정과 사회가 준성인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습은 자녀가 고교를 졸업하는 18세가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는 무언의 통보이며 자녀들은 ‘둥지를 떠날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전통적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교를 졸업한 자녀는 대학에 진학해 기숙사에 들어가든, 취업전선에 나가든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하며 부모는 더 이상 자녀교육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자녀 교육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자녀교육에 관한 한 부모들은 무한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것을 다하지 못하면 부모의 도리를 못한 것이 된다.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1년 쯤 해외연수에 대학원 그리고 외국유학까지도 못 보내서 한이다. 시집장가 보내고 아파트든 전셋집이든 살집까지 마련해 줘야만 부모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이러한 무한책임의 현실적 표현이 바로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녀교육이 모든 가치에 최우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입시가 온 국민의 최대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고, 입시전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는 데도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사회진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끝도 없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라고 자신들의 인생을 언제까지 희생시켜야 하는 것일까. 부모는 자녀교육을 어디까지 시켜주면 최소한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만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볼 수는 없을까. 요즘 입시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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