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열매가 둥글게 방을 짓고 대추의 퉁방울이 한결 단단해져 있다. 미처 울지 못한 매미의 노래가 계곡 속을 떠돌다 상수리나무둥치의 깊게 파인 상처에 가 박힐 때, 뜨거운 여름이 남기고 간 발자국 가득 담긴 대지의 벅찬 숨소리가 들길을 달린다.
굽힐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어느 사이엔지 가을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감돌면서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가을은 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가는 것이다. 떠나지 않을 것 같던 불볕도 어느새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있다. 자연도 변화의 사이클 속에서 인간을 죄었다 풀어주었다 하면서 맥박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이제 지난 여름이라 말하자. 그렇다면 그 폭염의 시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돌이켜 보매 그 시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벌써 베란다에 놓여 있는 동백 화분에도 꽃봉오리들이 맺히고 있다.
그렇다. 내년 봄이 오기 전에 피어날 동백꽃은 벌써 두 계절이나 앞서서 꽃송이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백 꽃송이들마다 겨울의 심장 속 붉은 꽃송이에 잉걸 불을 당기기 위해서 꽃잎 사이마다 마른 장작들을 잔뜩 쟁여놓고 있었다. 언젠가 그 장작들은 활활 타올라 겨울 한복판에 불을 지필 것이다.
여름 땡볕과 함께 한 시련의 시간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도공이 한줌의 흙을 빚어 그릇을 구워 내듯이, 그 불볕 속에서 자연물들은 성장하여 서늘하고도 굴곡진 모습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황금빛의 아름다운 선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생명은 더욱 더 크고 둥글게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시련 뒤에서야 반드시 결실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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