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춘추]가을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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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춘추]가을앞에 서서

  • 승인 2004-08-27 00:00
  • 김완하 한남대 문창과 교수김완하 한남대 문창과 교수
저녁 산책길을 홀로 걷다보면, 이따금 길섶의 풀잎을 흔들며 바람이 불기도 한다. 불볕더위의 여름을 지나 계절은 어느덧 가을 산으로 들어서는 듯하다. 그동안 우리 모두는 위대했다. 여름의 그 어떤 시련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해바라기의 둥근 얼굴이 태양을 따라서 돌고, 바닷물은 수평선 쪽으로 더 기울었다.

석류의 열매가 둥글게 방을 짓고 대추의 퉁방울이 한결 단단해져 있다. 미처 울지 못한 매미의 노래가 계곡 속을 떠돌다 상수리나무둥치의 깊게 파인 상처에 가 박힐 때, 뜨거운 여름이 남기고 간 발자국 가득 담긴 대지의 벅찬 숨소리가 들길을 달린다.

굽힐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어느 사이엔지 가을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감돌면서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가을은 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가는 것이다. 떠나지 않을 것 같던 불볕도 어느새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있다. 자연도 변화의 사이클 속에서 인간을 죄었다 풀어주었다 하면서 맥박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이제 지난 여름이라 말하자. 그렇다면 그 폭염의 시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돌이켜 보매 그 시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벌써 베란다에 놓여 있는 동백 화분에도 꽃봉오리들이 맺히고 있다.

그렇다. 내년 봄이 오기 전에 피어날 동백꽃은 벌써 두 계절이나 앞서서 꽃송이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백 꽃송이들마다 겨울의 심장 속 붉은 꽃송이에 잉걸 불을 당기기 위해서 꽃잎 사이마다 마른 장작들을 잔뜩 쟁여놓고 있었다. 언젠가 그 장작들은 활활 타올라 겨울 한복판에 불을 지필 것이다.

여름 땡볕과 함께 한 시련의 시간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도공이 한줌의 흙을 빚어 그릇을 구워 내듯이, 그 불볕 속에서 자연물들은 성장하여 서늘하고도 굴곡진 모습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황금빛의 아름다운 선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생명은 더욱 더 크고 둥글게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시련 뒤에서야 반드시 결실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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