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아침]가을이 기다려지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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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아침]가을이 기다려지는 까닭은

  • 승인 2004-08-23 00:00
  • 정순훈 배재대 총장정순훈 배재대 총장
역시 가을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입추(立秋)였다.
입추가 지나 문득 바라본 나뭇잎들, 푸른 서슬이 물러가지 않은 폭염 속에서 그 끝자락을 힘겹게 붙잡고 있다.

캠퍼스의 한 자리를 묵묵히 차지하고 있는 은행나무의 푸름도 서서히 노란빛에 젖어 가는 듯하며, 찬으로 올라오는 풋고추 또한 여름 독오른 제 때깔이 아니다. 달달해진 포도 맛이며, 아직 속은 덜 찾지만 제법 맛이 나는 꽃게에서도 가을의 맛은 묻어난다. 매미소리는 노련하다 못해 맥이 빠진 듯 하고 언뜻 귀뚜라미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여름이 가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하는 계절의 변화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제 가을이 왔다고 선뜻 선언은 했지만, 실상 밖은 아직도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 그 중 가장 열심히 사는 서민들의 땀을 식혀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을이 빨리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한 여름 폭염의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입고 있던 옷에 소금 꽃을 피워낸 많은 사람들, 전기세가 아까워 에어컨 켜는 것조차 손을 떨어야만 했던 가정주부들, 그들의 고단한 여름을 더 힘겹게 했던 미숙한 정치, 추락한 경제, 불안한 사회 등의 이야기, 이야기들이 불가마 더위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는데, 이젠 이 지겨운 이야기들과 더위를 가을바람이 날려버렸으면 한다.

가을이 된다고 우리네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는 꿈같은 약속은 없지만, 가을은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계절임은 분명하다.

가을의 선량한 품엔 고향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정겨움이 있다. 그 정겨움은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결실이 작고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 누구라도 쉬어 갈 수 있는 동구밖에 펼쳐놓은 편안한 평상 같은 것이다. 그 정겨움과 여유에 잠시라도 몸을 맡겨 잃었던 활력을 찾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가을의 풍요로움에 마냥 기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그곳에서 삶의 용기를 얻어 어느 때보다 더 추울지도 모르는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경제니, 정치니, 사회니, 국제정세니 하는 눈앞의 불안하고 미숙한 열기들이 우리의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했다.

이러한 불안의 징후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미봉책으로라도 얼른얼른 땜질처방을 하거나, 애써 책임을 회피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산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이제, 우리의 삶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현실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가을의 여유와 넉넉함과 같이 길게 내다보는 지혜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가을이 제 자리를 찾으면 무연이 하늘을 바라보자.

가을하늘처럼 가슴이 가없이 넓어져,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의 징후들을 주저 없이 털고 일어서 멀고 험한 길 다시 당당히 가야 할 힘을 얻게될 것이다.

우리네 삶은 스스로 제한하고 또 주변의 것들로부터 제한 받는 한정된 거리만을 달려 나아가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한정 없이 나아가는 무원부지(無遠不至)의 마음으로 가야하는 무한의 경주인 셈이다.

이렇게 고대하는 가을도 따지고 보면 고된 한철을 보내고 잠시 마음이라도 쉬어 가는 곳이기에 기다려지는 것일 게다.

금세 다리에 힘을 주어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고마워하며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제 주어진 길을 올곧은 마음으로 묵묵히 가야하는 것이다.

이제 천고마비의 평온한 품을 무원부지의 역설적 정신으로 맞이하는 것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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