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에는 손바닥에 뚝살이 생길 정도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신나는 아침이다, 걸어서 가자”라는 흥얼거림과 함께 불평 없이 걸어 다녔는데, 지금은 과체중을 걱정하면서도 자가용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전을 하면서 또한 연구원이 건강을 위해 더 많이 걸으면서, 도시 속에서 보기 힘든 논밭길을 즐겨 걷는다. 이제는 등산을 빼놓고는 땅을 밟아볼 경우가 드문 세상이 되었다. 도시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 속에서 논밭길은 필자에게 자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개구리와 두꺼비의 노래 소리는 도시의 청량제가 되어 준다.
과거 빈곤의 시기에는 도시를 동경했던 시민들이 지금은 자연 속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주5일근무제의 확산과 더불어 자연을 통한 삶의 질에 대한 인식이 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특별법에 의거, 신행정수도 건설예정지가 확정되었는데 불구하고 아직도 수도권 일부에서는 반대의 소리가 들려온다.
반대론자들에게 물어본다.
“서울의 오염된 공기, 대도시의 시끄러움,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혼잡함이 좋습니까? 교통체증 때문에 주말에 시외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현재의 서울이 좋습니까? 출·퇴근이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도시생활이 좋습니까? 연휴나 명절에 고속도로의 교통체증이 좋습니까?”
이런 질문에 반대론자들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삶의 질을 강조하고 대도시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신행정수도 건설을 반대한다. 보다 나은 질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데, 수도권 일부 주민들은 신행정수도 건설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부 반대론자들은 수도권집중 완화를 위한 방법상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많은 반대자들이 아직도 ‘서울최고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최고주의! 못살아도 서울에 거주한다면서 우쭐하는 가식, 사람이 많고 복잡한 곳이라면 좋다는 허울, 최고의 백화점과 초고층의 건물이 있는 곳에서 살아야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것 같은 허위, 최대 도시에 살아야 자신도 최고 주민이 될 수 있다는 착각….
전형적인 후진국의 허상이다.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선진국 주민은 생활의 여유로움을 찾아 조용한 자연적 중소도시를 선호한다. 서독의 수도이었던 본(Bonn)은 인구 30만명의 작은 조용한 도시이다.
경제발전으로 인한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공해, 복잡함, 교통체증, 각박함 등을 초래한다. 서울의 한강을 보면서 슈베르트의 ‘숭어’가 나오겠는가,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작곡되겠는가? 공해에 찌든 남산을 산책하면서 괴테가 문학을 논하겠는가?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신행정수도 건설을 반대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서울과 수도권도 인간적, 자연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서울최고주의’라는 허울에서 탈피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민의 뜻이 모아져야 한다. 가식과 허위에서 벗어나서 참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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