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 아이스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이었다.
이 방면에는 문외한이지만 갖고 있는 LD로 보아온 배리슈니코프 등의 발레와 좋은 비교가 되었다.
예술성은 별문제로 하더라도, 스피디한 움직임은 관객의 시선을 그물처럼 묶어놓았고, 단락마다 또는 고난도 스케이팅을 시연할 때마다 어김없이 박수가 터졌다.
대사 없는 발레공연에서 이처럼 공연자와 관객이 한 호흡으로 교감하는 현장은 쉽게 누릴 수 없는 멋진 체험이다.
본래 아트홀 음향시설은 녹음 음악의 재생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마침 방학 중의 휴일이어서 어린관객이 많아 주위가 다소 산만했음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좌석 예매율이 전국 2위라는 사실과 함께 대전시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성숙을 뿌듯하게 느낄 수 있었다.
10년 전 ‘영웅 만들기’라는 칼럼에서, “이탈리아의 통일은 가리발디가 이끌었지만, 국민정서의 화합은 베르디에서 시작하여 아미치스가 완성…” 이라고 쓴 적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 내셔널리즘 (민족주의로 번역한 것은 일본) 바람이 불고, 애국심 고취에 적격인 ‘오페라 전성시대’가 열린다.
베르디 비제 푸치니 바그너 등 소위 ‘국민음악파’ 작곡가들은 다투어가며 향토색 짙은 지방민요들을 발굴, 작품에 반영하였다. 아름답고 다양한 선율에 항상 감탄하는 차이코프스키 역시 국민음악파에 속한다.
비록 녹음이지만 감미롭고 귀에 익은 ‘호두까기 인형’의 선율 자체가 이 번 공연에서 관객을 매료시킨 가장 큰 주역임에 틀림없다.
국민 음악파들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뒤늦은 통일에 크게 기여하고, 제정러시아 젊은 지식인들의 피를 끓게 하였다.
‘통합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켜 국민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자각을 심어준 것이다.
필자는 ‘영웅 만들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분석하고 파헤칠 일이 있고, 덮어주고 미화해줄 일도 있으며, 그래서 만인의 귀감이 될 영웅담이 탄생하는 것이다.”
첨단기술로 하루 만에 만들었다는 아이스링크 앞에 앉아 금년여름 중 가장 시원하고 의미 있는 두시간을 보내고, 전당 앞 햇빛 쏟아지는 광장으로 나왔다.
오후 다섯 시의 강렬한 햇살이 오히려 따사롭게 느껴지는 것은 몸을 식히고 나온 탓만은 아니리라.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되돌아 보니 가족끼리 손에 손을 잡은 1000여명의 관객들이 뜨거운 햇살을 아랑곳 않고 여유 있게 광장을 걸어내려 온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문화와 예술은 전문인들의 창조와 공연에서 시작되지만, 시민들의 참여와 향유로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저 숱한 발걸음 자체가 곧 문화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기에 이것을 한동안 잊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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