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칼럼]정체 모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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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칼럼]정체 모를 정체성

  • 승인 2004-08-11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정체성 논란이 에릭슨(Erikson)에 의해 시작된 이래 이처럼 뜨거워본 적은 없을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공방을 보고 머릿속을 스치는 연구 결과가 있다. 어떤 새가 더 새다운가를 묻는 설문에서 사람들은 울새를 제일로 지목했다. 참새, 카나리아, 비둘기, 종달새도 높은 점수를 얻었다. 펭귄이나 타조는 저 멀리로 비껴 있었고 비상(飛翔)하는 유일한 포유류인 박쥐가 단연 꼴찌였다.

펭귄이나 타조는 덜 일반적이어서 덜 새답다는 것뿐이지, 새다. 망고나 금귤보다 사과나 복숭아를 과일답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울이 대한민국 자체라는 물때썰때 모르는 사고방식은 좀 다르다. 마치 사과만 먹다가 복숭아나 망고를 과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장 가구다운 가구의 유형으로 의자를 꼽는다고 책상의 존재가 무시될 수 없는 것과 한가지다.

토마토가 과일 아닌 채소라는 이 당연한 사실이 미국에선 재판으로 가려졌다. 관세 때문이었는데, 우리는 기득권 때문에 토마토 재판을 연상시키는 헌법소원 절차를 굳이 진행 중이다. 개인적 경험으로 토마토가 채소인 것은 직접 밭에서 가지, 고추, 상추, 치커리와 나란히 재배해보고 확연히 알게 됐다.

다원적 가치관의 유연성은 서재에서보다 채마밭에서 더 많이 배운다. 언어유희 같지만 지도(地圖)와 자(尺)가 부족한 지도자들,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 갈피를 모르는 정치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방법이다. ‘연기·공주 행정수도’를 정체성의 위기에 연결짓는 것은 지도 읽기에 서툰 결과이며 지배세력 교체론과 결부시킴은 잣대가 휜 결정적 증거다. 그걸로는 정체성의 정체에 다가가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호박넝쿨처럼 볼품없이 늘어졌어도 내 참된 모습이면 자아정체성이다. 북악산이든 연기군 남면의 전월산이든 국가가 지닐 참모습이면 국가정체성은 둥지를 튼다. 웰빙 서울, 경제수도… 좌우간 어떤 시도든 서울의 정체성을 덧낸다며 폼잡는 사이에 고구려사(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중국사라며 역사정체성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뭔가 존재의 뿌리 찾기가 잘못됐다. 갈등과 충돌의 한 중심에서 뜨내기 장사꾼처럼 제 이익만 좇으니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념의 무지를 정체성의 위기로 포장하거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정체성 논란으로 컬러링(염색)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근원적인 실수는 정체성이란 말의 정체성마저 상실케 했다는 데 있다.

“요즘 나라꼴이 이렇게 가는 걸 안 의사가 아시면 ‘나 괜히 죽었네’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한다하는 정치인들의 백 마디보다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유오성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폐부 가까이 와 닿는 요즈음이다.

말이란 일반화된 동의를 얻기까지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에 내몰리기도 하는 법이다. 정체성 공개토론, 하자면 못 할 것 없다. 한데 입씨름 끝에 얻어지는 것이 진정한 정체성일까? 이제 결론이다. 종래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동질성과 중앙집중에 있었다. 서울은 병들었다. 새 처방은 다원주의와 분권화―이는 연기·공주 땅에 성취하고 재구성해야 할 행정수도의 봉인이 풀리는 날 얻어질 수 있다. 그 길은 아직 험하다.

그래도 그레고리 헨더슨이 한국정치의 변증법을 말하면서 밝힌 다음 구절로 위안을 삼는다(‘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올아카데미).

“불원간 한국은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기득권 단체들 간의 더 많은 타협, 줄어든 히스테리, 더 확산된 온건주의, 즉 간단히 말해 좀더 이상적인 정치적 경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경제혁명이 정치적 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며 현재까지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튼튼한 한국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길고 괴로운 탐색이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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