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의 친정어머니인 이경령 여사의 팔순잔치때 찍은 35㎜ 컬러 필름인 이 동영상에는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75년 일가친척이 모여 식사를 하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담겼다.
박 전 대통령은 34분짜리 동영상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수 고복수의‘짝사랑’을 불렀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는 첫 소절로 노래를 시작한 그는 노래 중간중간 “(목소리가 잘)안 나온단 말이야”라고 목을 손으로 쓸어내려 가며 몹시 쑥스러운 듯 미소짓고는 1절을 간신히 끝마쳤다.
당시 23세로 작고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역할을 의연하게 해냈던 장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모습도 보였고, 앳된 얼굴의 박지만씨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새마을 노래’를 부르다 가사를 틀려 웃음을 자아냈다. 박 전 대통령은 “지만이, 틀려도 괜찮아, 해”라고 격려했다. 박 대표 역시‘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대통령 가족의 한때 단란했던 영상물로 소개될 수도 있었건만, 어딘가에 쓸쓸함이 잦아들었다. 아내없이 장모 팔순잔치를 위로하려 안간힘을 쏟는 ‘초인(超人)의 노래’에서 숱한 인간적 약점을 뛰어넘을 수만도 없는,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보통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인간적인 냄새가 흠뻑 느껴졌다.
백악관 경내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애견과 함께 풀밭을 뒹구는 대통령의 모습, 평화롭고 여유있는 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미국인은 세계최강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다고 하지않던가. 그만 못해도 ‘노래하는 대통령’의 옛 모습에서 잠시나마 과거로 먼 추억의 여행을 함께 떠났다 돌아온 풋풋한 감정을 맛본 듯 했다.
그가 세상을 뜬 지도 어언 25년.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각,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온갖 논의 중심에 그가 여전히 우뚝 서있다. ‘행정수도 이전’ ‘친일진상 규명법’부터 최근의 ‘대한민국 정체성’ ‘정수장학회’ 논란에 이르기까지 2004년 우리 사회에서 불거지는 대부분의 논쟁이 그를 비켜가지 못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시대적 ‘영웅’이자 ‘독재자’였던 그가 여전히 ‘향수’또는 ‘망령’이란 이름으로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산 대통령 다섯이 죽은 대통령 하나만도 못하다”는 객주집 푸념들이 더욱 리얼리티하다. 그만큼 민생의 삶이 절박한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정치권 주변에서 나라의 미래와 장래를 걱정하면 ‘수구꼴통’ 취급을 받는다. 개혁세력에게는 “과거를 덮고 가자는 얘기냐”는 반동쯤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과거의 흠결만 보일 뿐이다. 죽는 곳 인줄 모르고 오로지 밝음만을 좆는 ‘부나비’증후군에 집단몸살을 앓고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나 ‘과거 청산’만으로 건국원년이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박통’과 ‘3공의 포로’는 기득권자나 ‘수구꼴통의 추종집단’이 아니라 과거를 역사로 볼줄 모르는 개혁과 청산에만 몰두하는 원리주의자들이 아닌가 싶다. 이쯤에서 과거를 ‘극복의 대상’에 두고 ‘역사의 장’에서 멋진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치정’(治定)의 리더십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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