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서로 오랫동안 잘 사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 “……” “우리 같은 부부를 뭐라 하잖아, 왜!” “아! 웬수?” 그러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얼른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힌트를 주었다. “아니… 네 글자. 네 글자.” 그러자 할머니가 손벽을 치며 소리쳤다.
“알았다! 평생웬수.” 이따금 주례를 서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직 주례를 설만한 경륜이 아니라고 거절하지만 이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태를 생각해서 선뜻 나설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주례를 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신랑·신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렇잖아도 하얀 머리가 더 하얗게 되곤 한다.
얼마 전 신문 지상에 우리나라 이혼율이 47%라고 해서 한동안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혼율이 47%일까? 47%면 대충 한 집 건너 한 집은 갈라선 가정이라는 건데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숫자는 어떻게 나온 걸까? 2002년 한해동안 이혼한 쌍(14만5,324쌍)을 혼인한 쌍(30만6,573쌍)으로 나눈 후 100을 곱하여 만들었다. 얼핏 보면 타당한 통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혼인은 2002년에 결혼한 커플의 숫자이지만 이혼은 다르다. 이혼이야 2002년에 했지만 이들이 결혼한 시점은 다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길에서 혼수문제로 싸우고 돌아와 바로 이혼한 커플도 있고 30년 전에 얼굴도 못본 채 부모가 정해준 대로 결혼해서 잘 살다가 아들딸 시집·장가보내고 갈라선 황혼이혼도 있다. 다시 말해 모든 혼인한 부부가 이혼의 가능성을 갖고 사는 셈이다.
이렇게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숫자를 비교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그동안 수 십 차례의 방송출연이나 강의를 통해서 또는 신문 기고를 통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한번 퍼져나간 ‘이혼율 47%’라는 숫자는 마치 ‘두더지잡기 게임’의 두더지처럼 지금도 살아서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난다.
깨끗한 곳에 쓰레기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 양심에 가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쓰레기가 있는 곳에 버리면 죄의식을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남들은 안 하는데 나만 하는 일에는 눈치를 보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면 별 생각없이 따라하게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의 기준으로 우리는 절반, 즉 과반수를 생각할 수 있다. 절반을 넘어서면 마치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급격히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혼율 47%라는 통계는 그래서 위험한 숫자이다. 이것이 바로 통계의 위력이다.
백 마디의 말보다 숫자 하나가 주는 의미가 많은 사람들을 휘어 잡는다. 그리고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숫자는 아메바보다도 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남는다. 그래서 하나 하나의 통계치를 만들어 발표할 때면 한편으로는 흐뭇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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