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칼럼]투사의 시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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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칼럼]투사의 시대, 그 이후

  • 승인 2004-07-14 02:42
  • 이형권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이형권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그 시절은 그랬다. 군부 세력의 폭압적 무단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열렬한 투사가 요구되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는 개인적 삶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인류 보편의 가치와 공동체적 삶을 위해 희생한 민주 투사들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80년대 이전의 군사 독재에 대항해 민주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오늘의 참여 정부가 탄생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없진 않으나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그 절차가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엇나간 국가 권력에 의해 매도당했던 개인의 인권과 자유도 본연의 가치를 되찾고 있다.

광복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행세하지 못하고, 몇몇 사대주의적 권력자들과 매판 자본가들의 그늘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국민들이 제 주권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적잖은 구성원들은 아직도 투사의 시대가 갖는 습속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일반 대중에서 사회 지도층, 화이트 칼라에서 블루 칼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익(특히 경제적 이득)을 위해 격렬한 거리 투쟁을 일삼는 장면이 쉽사리 목도되곤 한다.

모든 국민이 투사가 되려는 것일까, 각양각색의 이익 집단과 단체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열렬한 투쟁을 일삼고 있다. 대화와 타협은 간 데 없고 행동과 투쟁만을 앞세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투쟁은 대부분이 80년대 이전의 것과는 명백히 다른, 소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소아병적 행동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투사적 기질과 행동 양식은 더 이상 시대적합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극렬한 투쟁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렬한 투사가 아니라 노련한 협상가가 시급히 필요하다. 나날이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이견을 조정하여 사회적 역량을 극대화할 협상력을 갖춘 인재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나간 역사는 단순한 회고와 반추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는 새로운 전망을 위해 봉사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저 80년대 투사의 시대에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투사 시대의 가치와 행동을 아직도 맹목적으로 추수하는 일은 더 이상 역사를 선도할 책임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지금은 분명히 투사의 시대, 그 이후다.

원형극장의 검투사는 고대 로마 제국이 요구했던 인물이고, 황야의 카우보이는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필요로 했던 인물이다. 거리의 투사는 80년대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했던 인물이다. 그들은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부여받아야 할 존재다. 그렇지만 그들을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지는 않는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인물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적 이해 관계를 아우르고 조정할 줄 아는 유능한 협상가다. 얼마 전의 김선일 씨 피랍 사건이나 요즈음 뒷북치듯이 논란이 무성한 행정 수도 문제만 보더라도 협상력을 갖춘 유능한 인물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요긴한가 금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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