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복 대신 색동옷을 입힌다고 병이 낫지 않듯이 말이란 게 그렇다. 부인(婦人)을 풀어보면 (남편을 위해) 빗자루를 든 사람, 또 다른 부인(夫人)은 지아비의 사람, 남편의 소유물이다. 외표적으로 ‘아줌마’보다 고상하지만 근원적 의미는 이다지 참담하다.
본질은 아니더라도 지금 서울대 농활대와 아산농민회 간에 불붙은 ‘아줌마’ 논쟁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학생들은 마을 농민이 여대생에게 ‘아가씨’, ‘아줌마’라 부른 것에 언어적 성폭력과 양성평등 문제를 제기했다. 농민회 측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사소한 갈등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몸을 더듬고 옷 속에 손을 넣었다”는 물리적 성폭력에 대한 시비는 가리지 않기로 한다.
민망했던 건 이번 농활(농촌현장활동)의 테마가 하필 ‘양성평등’이란 사실이었다. 아줌마 호칭이 원체 가치중립적이지 않아 생긴 일이기도 하다. 국회 첫 상임위에서 남성의원이 특정인을 아줌마라고 지칭했다가 여성의원들에게 된통 혼쭐난 사례도 비슷한 반열에 넣을 수 있는 알레르기 반응이다.
여기서 가부장 사회의 아주 오래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전통어법에서 여성 비하는 남자-여자 병렬의 원칙을 넘나들면서 집요하게 이뤄진다. 부정적인 용도에 한해 놈년 아닌 연놈이었고, 계집 서방이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는 가족계획 계몽 차원의 특별 케이스다. 여편네라는 멸시하는 말에 대응, 남편네가 잠깐 쓰인 흔적은 있지만 언중 속에 스며들지는 못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배하는 의식이다. 농민 아저씨가 저녁 술자리에서 부른 아가씨, 아줌마는 평소의 논두렁 화법이 은연중 탁하게 걸러져 나왔을 수도 있다.
두둔하자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도심의 빌딩 속 사무실에서도 횡행한다. 오죽하면 법무부에서 멀쩡한 ‘양, 여사, 아줌마’를 성차별적 용어로 간주하고 개선 캠페인을 벌인다 할 정도다. ‘아줌마, 아가씨, 언니의 사회학적 연구’와 같은 논문도 나와 있다.
억울하게도 아줌마가 갖는 함축성은 수다, 펑퍼짐함, 천더기, 뻔뻔함 등 도매금으로 모독하는 요소가 대부분이다(아가씨는 술집 아가씨쯤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친정의 출가외인(出嫁外人), 시댁의 입가외인(入家外人)인 이 고독한 아웃사이더들을 향해 아줌마라 부르기 미안할 때가 많다.
가부장적 성별 분업의 질서까지 담겨 있음을 알면 참으로 그렇다. 아줌마의 근원을 찾으면 극히 생물학적인 유래를 가졌다( <小>+암<암컷>+이<주격 조사>). 아기주머니를 가진 사람―딸, 엄마, 며느리, 시어머니를 막론하고 자궁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생산을 위한 암컷’이 나쁜 뜻만은 아니긴 하다.
또 같은 말이라도 의식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얼마든지 격상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버니에 맞서는 아주머니나, 마님이나 마나님, 마마님 등 천하없는 말로 모셔본들 그저 ‘쭘마’에 머문다. 잘못하면 쓰레기통 치우면 테러 예방된다는 것만큼이나 허튼 소리가 된다.
그래도 아줌마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들면 헌법소원 같은 것 생각지도 말고 차라리 다른 단어를 새로 만들자. 아가씨(미스)와 아줌마(미시즈) 구분 없는 미국의 ‘미즈’와 같은 말을 따로 만들어도 유용할 것이다.
언제고 불쑥 주차관리인에게 들어도 살갑게 안겨드는 그런 단어, 골치 아픈 이데올로기로 다가가기보다 정신적 만족의 고지까지 가득 ‘리필‘해주는 상큼한 단어라면 좋겠다. 아무튼 아산의 논쟁들이 잘 아물려져 보다 나은 연대를 이루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글을 맺는다. 나머지는 한국문화 담론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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