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0시간근무, 즉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감개가 무량해진다. 우리에게 쉰다라든가 논다라는 말은 실직이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젊은 사람이 놀아서야 되나? 실직자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며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주일에 이틀을 놀아야만 되게 된 것이다.
최근 한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의사친구 하는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는 놀랄 정도로 정신질환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현대의 인간은 대부분 정신질환자라는 식의 현학적 내용이 아니었다.
성공한 남편, 훌륭하게 자란 자식을 두고, 재산도 넉넉한 중년 부인중에 조울증을 호소하는 정신이상 환자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흔히들 짐작하듯이 남몰래 남편이 바람피우는 건 아닌가고 의심하지 말라. 남편이 대단히 가정적인데도 그런 환자가 찾아 온다는 것이다. 하긴,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경제적 풍요와 세심하게 배려되는 복지만으로도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없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또 무엇인가. 아무리 벌어도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틀렸다. 단적으로 말하건대, 그건 문화의 빈곤 때문인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과 돈을 행복하게 쓸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로스토우’는인간욕구의 마지막 단계는 창조나 자아완성이라고 했다. 자아완성이라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버리는 성취감이다.
창조와 성취. 문화라는 말의 구체적 표현이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많거나 경제적 여유가 많다고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단지, 시간과 돈이 없으면 접하기가 어려울 뿐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경제적 관점에서 이 문화를 보아왔다.
문화상품이나 문화산업이라는 어휘에서 보듯이 문화를 통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돈을 번다는 관점에서 문화를 육성한다고 했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볼 것이 아니고,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보아야 한다.
돈을 왜 버는가?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이에 대한 본질적인 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될 뿐, 늘 신형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기 위해 가족간의 시간도, 부부간의 대화도 희생하는 잠재 우울증 환자일 따름인 것이다. 경제적 관점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언제나 가격표가 붙은 천박한 세상이 된다.
최고가가 아닌 것에 만족할 수는 없다. 문화적 관점에서 세계를 보아야 그 세계는 값에서 자유로와져 비로소 삶의 다양한 의미를 새겨 보게 되지 않겠는가. 진정한 대박은 돈을 아끼지 않고 쓰게 할 때 터진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가치. 명품의 브랜드는 문화의 딸인 것이다.
이제 일주일에 이틀을 쉬게 되었다. 문화에 시간을 투자하자. 예술에 여가를 보내보자. 문학의 심연속에 삼매경에 빠져보고, 합창의 메아리, 노래의 날개 위에 스스로를 실어보자. 사군자의 묵향을 음미하며, 화사한 꽃 그림의 나비가 되어 저 어릴 적 동심의 꿈을 남몰래 그려보자. 루브르 궁전의 문화의 향연속으로 상상의 가인을 동반한 화려한 외출을 준비해보자.
고백하건대, 하늘은 우리 모두에게 꿈을 그려보라고 속삭였건만, 우리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버렸다. 문화를 모르는 동물들의 휴식이 그저 일상의 공백일 뿐이듯이, 창조적 동심의 꿈을 버리고 문화를 잊었던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느 날 휴일이면 하릴없이 그렇게 공허하고 우울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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