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눈도장 찍으려는 귀족들의 주머니는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는데 바로 요새 말하는 지배세력 교체라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그 무렵, 조선 창덕궁의 주인이 된 정조는 후원에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길러 등용하려 했다. 베르사유와는 완연히 딴판이지만 역시 세대교체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서두에 이 얘기를 인용하는 것은 요즘 아주 해괴한 역사 공부를 하고 있는 세태가 보기 딱해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다리라더니 언제 우리가 일시에 역사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로 데뷔했었나 하는 착각을 갖게도 한다.
한편으로는 역사책의 어느 한 페이지만 뒤적거려 부정적인 사례들만 죽 나열하려니 별의별 역사가 다 튀어나온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구상까지 역사에 편입시켜 '행정수도' 아닌 '임시수도'였다는 것에 이르면 거의 말꼬리 잡기 수준이다.
다산 정약용을 끌어들여 백제 멸망의 원인을 천도에서 찾는 것은 역사적 견강부회의 극치라 할 것이다. 백제가 공주(웅진)로, 부여(사비)로 옮겨다녀야 했던 배경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린 처절한 사연은 알고도 모른 체한다.
역사의 행간까지 읽어내면 장수왕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천도 이유에는 지배세력을 친위부대로 교체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행정수도를 지배세력의 교체 등 왕조의 전례에 따른 혁명적 수단쯤으로 몰아붙이려는 데는 함정이 있다. 그 옛날의 개경파와 서경파처럼 찬반 양론으로 갈라선 국론 분열의 당사자들이 국론 분열을 하지 말자고 외친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자명하다. 수도 서울은 권력의 출구이며 기득권의 아성이라는 인식이 자락에 깔린 까닭이다.
그러면서 대전정부청사가 행정의 효율성에 어떤 득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것은 워낙 강고한 서울주의 때문이고 또 행정수도 이전의 역설적 전제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쯤에서 전국토의 11.8%인 수도권에 인구의 47.2%가 몰린 과밀집중은 두둔하면서 한반도의 허리, 충청권의 과밀집중을 겁내는 의중이 속속들이 보인다.
조선의 한양 천도는 남경 설치로 그 300년 전부터 예비되었느니 하여 행정수도를 혹세무민형 천도로 만들려는 저의는 너무 의도적이다.
다시 역사로 돌아가서, 아마도 신라 왕경 6부의 지배세력이 지방민을 통치했듯 수도권의 특수지위나 메커니즘을 마르고 닳도록 뺏기기 싫은 것이다.
신라 신문왕의 대구 천도 무산은 경주에 뿌리를 둔 지배세력인 진골의 깊고도 깊은 터전 때문이었다. 터놓고 말해 그렇게 수포로 돌리고 싶은 것 아닌가.
현직 대통령이 궁예인가 이성계인가, 김안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이 무학대사냐 정도전이냐 하는 패러디는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다.
대전에 온 대통령이 역사나 소설책을 보면 천도는 그 사회 지배권력의 향배에 관한 문제라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 말을 꼬투리 잡아 역성혁명에 성공한 권력에 비기는 것은 음모론 수준이다. 행정수도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도에 지나치다.
불확실한 것, 잘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걸 아주 감성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여소야대 호시절에 압도적으로 통과시켜 놓고 그때는 바빠서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법의 규범력 차원에서 변질됐다니, 순전히 구경꾼 모으려고 싸움판을 벌이는 수작으로밖엔 안 보인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행정수도 이전이 진짜 천도라면 이성계처럼 성공한 천도로 만들면 될 게 아닌가. 이충무공 동상 하나에도 역사성이 있는데, 과천이나 대전청사 건설에 역사성이 있다는데, 행정수도 이전에는 비할 데 없는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역사성을 논하려거든 역사책을 제대로 읽고 나서 하자. 최소한 그래야 역사를 후퇴시키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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