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무슨 날이지요?”- “내일 요? 글쎄? 무슨 날인가요?”-“잘 모르시겠어요? 정말? 6·25 전쟁이 터진 날이지 않아요?”- “난 또 뭐라고, 그런 걸 왜 물어?”- ”기념할 날이지 않아요? 54 주년이 되는?“ -“ 여보슈, 새삼스럽게 굴지 말아요.
그 케케묵은 걸 기억해서 뭣에 쓴단 말이요? 아,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땐가? 남쪽이나 북쪽이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요?
서해안 군인들도 서로 전화통신도 하고… 또 철책 선에 있는 양측 선전 확성기도 철거한다지? 열흘 전에는 6·15 공동선언 기념행사도 함께 했어요. 동족끼리 잘 해보자고. 세상이 변했는데 사람도 변해야지. 안 그래요? -“ 아. 예.
그런데 요즘 시국이 좀… 주한 미군도 감축한다고…어? 그냥 가버리네. 예? 다른 사람도 만나라구요? 아! 마침 저기 한 분이 오네. 내일이 6·25 일어난 지…” - “당신 참 이상하군. 혹시 수구냉전, 골통 아니야? 이것 봐요.
내가 충고 하나 하지. 그런 걸 자꾸 물으면 우리 나라가 잘 안돼. 뒷바퀴를 돌리겠다는 거야, 뭐야? 우리는 자꾸 앞으로 나가야 돼. 우리가 그런 걸 기억하고 어쩌구 하면 저쪽에서도 싫어할 거구.
내가 유식한 소리 하나 할까? 민족이나 나라나 골 아픈 기억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어떤 친구가 지난 걸 붙들고 매달려 봐. 앞길이 콱 막히지. 당신도 조심해” - “예. 예. 아. 그런데 이 동네 모두 같은 생각들입니까?
아, 저건 뭐지요? 벽보 같은데?” -“그거? 저 건너 ‘기억 동네’에 사는 어떤 미친 녀석이 갖다 붙인 거지”- “아, 스튜디오? 들립니까? 이거 어떻게 하지요? 이 벽보 글들? 예? 이거 제목이 제법 폼이 나네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서도 근심 어린 충정으로 천하를 마주한다’(樂以天下 憂以天下-孟子 梁惠王 下). 흠! 그래?”
‘전쟁통에 생긴 고아들, 이산가족들. 전장에서 스러진 꽃다운 청춘들, 부상자, 행방불명자들, 그 수천, 수백만의 목숨들을 이제 없던 일로 치잔 말인가? 새로운 시대, 개혁의 시대, 변화의 시대라고 민족이 겪은 처절한 비극을 통째로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억조차 꺼리는 것은 더욱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기억해야 한다. 비극을 기억하는 나라가 어디 한둘인가? 어느 나라나 다하는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 호’를 보라. 1941년 12월7일. 한 발의 일본군 폭탄이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인 이 배를 격침시켰다. 수병 1177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지금도 바다 밑에 그 배를 그대로 둔 채 입장료 한 푼 받지 않고 구경시킨다. 왜? 진주만 기습을 기억시키기 위해서다. 또 폴란드 남부에 있는 아우슈비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유래 없는 인간도살장이었던 수용소다. 약 150만 명의 목숨이 독가스로 사라졌다.
지금은 기념관이다. 사람 기름으로 만든 비누, 피부로 만든 램프 갓, 머리카락으로 만든 섬유, 독가스 깡통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어린 학생들도 자주 찾는다. 더러는 밤에도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고 토론한다. 참담했던 옛 일을 기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어른들은 또 어떤가? 우리들은 지나치게 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두 번 다시 같은 비극을 뒤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국가가 개인의 망각을 방치하고 한술 더 떠 국가의 망각까지 보탠다면 이는 더 큰 일이다. 만에 하나, 일이 터지면 다시 비극을 막을 힘이 없게 된다. 개인의 사적 망각과 국가의 공적 망각이 다같이 짝짜꿍해서는 못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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