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한국전쟁의 발화점이 최고조에 다다를 즈음, 당시 극동군 사령관으로 ‘태평양전쟁의 영웅’칭호를 부여받던 맥아더 장군이 돌연 유엔 극동군 총사령관자리에서 해촉돼 고향을 향해 돌아왔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그 당시 美국민의 70%이상이 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맥아더의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가장 큰 정치사건”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를 반영하듯 의회도 청문회를 열어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목청을 높였다. 대통령 고유의 인사권한과 판단이 이처럼 美국민의 대대적인 반발을 샀던 적도 역사에 흔치 않은 일로 기록됐다.
급기야 맥아더 장군의 파면은 시카고 퍼레이드를 통해 금의환향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고 도로연변에 나선 환영인파는 장광의 물결로 이어졌다. 그 유명한 ‘귀거래사의 대표적 명언’,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대목을 남기고 조용히 ‘역사속의 인물’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호사가들은 정치와 정적(政敵)관리 측면에서 ‘시카고 퍼레이드’가 또 한번 역사를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평가했다.
1950년 겨울 한국전에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면서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은 깊어졌고, 그의 파면에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확전을 요구한 반면, 트루먼은 휴전협상을 원했다. 결국 그의 파면을 끝으로 한국전도 1953년7월 휴전협정에 들어갔다.
단 한 건의 ‘시카고 퍼레이드’가 이처럼 미국역사를 바꿔놓은 직접적인 동인(動因)은 무엇이었을까. 단연 ‘정적(政敵)관리술’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트루먼의 뒤를 이어 아이젠하워가 재선을 일궈냈다. 그 역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맥아더와 같은 군문출신인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는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강했고, 1952년 대선에 첫 출마할때는 한국전쟁 중이었다. 트루먼과 아이크는 반공·반소 강경노선을 펴며 공존관계였으나 맥아더 만큼은 잠재적 경쟁상대로 공적(共敵)취급을 했다.
만약 1948년 대선에서 맥아더가 후보로 나섰다면 아이크 역시 떼밀려 대선에 출마했을 뻔했고, 트루먼은 상대적으로 설 땅이 없었을 것 이라는 게 정설이다. 시쳇말로 맥아더 해임은 당시 美 대선구도의 역학관계로 미루어 ‘정적 죽이기’나 다름없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격으로 거꾸로 화려한 퇴임행사를 치러 줬다. 정치권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노병’으로 美국민의 뇌리에 못박아 두도록 만든 것이 바로 ‘시카고 퍼레이드’였다. 요즘 말하면 ‘이미지 정치’의 원조쯤이라나 할까.
아무튼 ‘노병’의 마지막 길에 범국가적인 명분과 범세계적인 명예를 두루 안겨주었다. 맥아더도 정적들에 의해 마련된 이벤트효과의 궁극적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바 아니었을 것이다. 이쯤은 돼야 하지 않을까.
엊그제 또 다른 ‘노병의 길’을 가기로 자처했던 JP(김종필 전 자민련총재)가 법정에 섰다. 또다시 “심통(心痛)을 가슴에 안고 가지 않도록 해 달라”는 최후진술을 남겼다니 전해 듣는 이들이 가슴이 몹시 아프다. 동양문화의 중심을 말하던 우리다. 비단 JP 문제만이 아니다. 떠나는 원로에게 왜 우리는 고작 이 모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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