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영화는 원작에 담긴 신들의 이야기를 모두 빼버렸다.
남은 것은 아킬레스가 신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 하지만 아킬레스는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흠모하는 아이에게 “그렇다면 어찌 내가 갑옷을 입겠느냐”고 말함으로써 이마저 부정한다.
이는 곧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신전에 있는 아폴론(로마의 아폴로) 신상의 목을 주저없이 베어버림으로써 이어진다. 신의 진노가 있기를 기대했던 트로이인들의 믿음을 깨는 것도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 “신이 화살을 쏠 줄 안답니까?”.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온 것은 프리아모스 왕의 선택. 그리스인들이 목마를 남기고 퇴각했을 때 영원불패의 신화에 젖어 있던 그는 사제장의 말에 따라 목마를 성 안으로 옮긴다. 이로써 트로이의 멸망은 시작된다.
아킬레스의 말을 더 들어보자.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죽거든.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살기 때문에,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죽지 않는 존재는 추악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인간이기에 순간 순간에 분투한다. 헥토르가 쓰러지고 아킬레스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이 땅에 온전히 인간들만이 살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디세우스가 말한다. “사람은 영원을 갈구하기 때문에 삶의 흔적에 집착한다. 훗날 그들이 우리를 기억해줄까? 우리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는지…” 이 얼마나 부질없는 처연한 욕망인가?
전쟁터에서도 인간은 룰을 지킨다. 아들이 트로이에 가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화롭되 평범하기만 한 존재로 살지 말고 역사가 기억할 존재가 되라면서 전쟁터로 밀어내는 아킬레스의 어머니, 헥토르가 자신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당당히 나와 싸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트로이 성 앞에 단신으로 나가 ‘헥토르’만을 반복해 부르는 아킬레스, 아킬레스와 결투하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킬레스의 도전에 당당히 나가 싸우다가 죽음에 이르는 헥토르(프리아모스 왕 역시 아킬레스의 어머니처럼 죽으러 나가는 헥토르를 격려한다),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단신으로 찾아온 프리아모스왕에게 시신을 돌려주며 12일간의 장례식 기간을 인정해주는 아킬레스. 그러기에 그들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호머는 “숨을 거둔 뒤에도 우리 눈에 비치는 그의 모든 것은 아름답구나”라고 그들을 찬양하고 있다.
물론 전쟁은 따뜻한 가족애와 고결한 애국심, 충성스런 민족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트로이가 결국 야만스럽고 탐욕스런 아가멤논 왕의 승리로 짓밟히고 파괴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없고, 미화될 수도 없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고, 피는 젊은이들이 흘린다.
그리고 그 영광과 명예는 늙은이들이 다시 차지한다. 그리고 헥토르의 물음처럼 수많은 과부가 생기고 전쟁 고아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살아남은 자들이 이 역시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기억하고 마는 능력을 가졌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전쟁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영웅이기를 바래서 줄기차게 영웅을 만들어내지만 그 영웅의 모습에 곧 실망하고 마는 인간들….그래도 결국에는 저 트로이인들처럼 이 세상은 온전히 인간으로서 감내하고 살아내야 하는 곳, 모든 사람들이 항상 마지막 순간에 사는 존재들임을 알고 매 순간 분투하며 매 순간 아름답게 사랑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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