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529m의 부성산성은 6세기 초에 군사목적이 아닌 중국과의 통교를 목적으로 축조됐고, 또한 현재의 대산항에서 부성산성과 서산마애삼존불 부근을 거쳐 웅진(공주)과 사비(부여) 지방으로 오가는 백제시대 대중국교류의 주요 통로였음이 확인됐다.
특히 이 산성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중국과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최근 신행정수도의 임해관문으로 주목받고 있는 서산시 대산항이 역사적으로도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6세기부터 한반도의 문호(門戶) 삼국시대 백제문화권에 속했던 서산은 6세기경부터 대륙의 문물을 흡수하여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과 같은 독창적이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창출해 냈고, 이를 내륙지방에 전파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660년에 당의 군대가 덕물도(현 덕적도)를 거쳐 상륙했고, 663년 당나라 장수 손인사 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공격할 때에도 다시 덕물도를 거쳐오는데, 육지로는 덕물도에서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현 대산항 지역으로 상륙한 것이 분명하다.
신라 진성여왕 7년(893)에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최치원이 서산지방의 수령인 부성태수로 근무하게 되고 당나라로 가는 사신인 하정사로 임명된다. 고려시대에도 서산지방을 경유하여 남송 과의 사신왕래나 교역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서산은 고려시대까지 한반도의 문호(門戶)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산시 대산항은 중국과 최단거리(대련 461, 청도 538, 천진 736km)에 있다. 수심도 11∼40m(인천항 5∼15, 부산항 5∼14m)로 깊어 20만t급 대형선박이 자유로이 접안할 수 있고, 항만확장도 용이하다.
육지로 둘러싸인 천혜의 항만으로 자연재해가 적고, 연간 안개일수도 26.3일(인천 47.8, 군산 44일)로 현저히 적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현 시점에서는 포화상태의 수도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1시간대 접근이 가능하다. 지난 91년에 민자로 건설된 현재의 대산항은 유류 전용부두로서 국내 최대규모로 종합적인 물동량으로 따져도 부산, 인천에 이어 전국 3위를 자랑한다.
그러나 현 대산항은 유화단지 자체의 물동량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2000년 기준 150만t의 수출입 물동량이 부산, 인천, 광양항을 통해 처리됐다. 여기에 금년부터는 연15만대의 완성차가 서산에서 수출길에 오르고 68만대의 변속기 등 총314만t의 물동량이 추가로 처리되어야 한다. 천문학적인 추가 물류비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복합물류항으로서의 확장이 시급하다.
신행정수도가 충청권에 입지하게 된다. 신행정수도의 입지가 어디로 결정되든 그 임해관문은 서산이며, 대산항이 최적지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다목적으로 활용할 대산항을 건설키로 하고 이미 지난 2002년 사업에 착수했다. 오는 2011년까지 총 4373억원을 투입해 대산항을 8선석 규모의 복합물류항으로 건설하고, 연간 588만t의 물동량을 처리키로 한 것이다.
향후 대산항의 세력권내에서 발생하는 물동량은 물론, 대중국 교역에 따른 항만물류가 대산항에 집중될 전망이다. 대산항은 21세기 동북아경제의 중심축이자 우리나라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전진기지이다. 대산항의 조속한 건설과 규모의 확장이 뒷받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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