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및 명청교체의 와중에서 요동치는 동북아권 국제관계의 파도를 명분 하나와 자신의 고집만으로 헤쳐 나가다가 결국 명나라로부터 또는 청나라로부터 끝끝내는 자신의 조국 조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임경업 장군의 신산한 삶은 탁월한 그의 능력과 대비되어 민중들의 뇌리에서는 오래 기억이 되어 내려왔다. 민중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는커녕 시대를 더할수록 더 큰 괴임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문학의 흐름을 슬쩍 훑어보아도 적실하게 드러나는 사항이다. 천여 종을 헤아리는 고소설 가운데 역사상 인물이 주인공이 된 작품이 드문 현실인데도 ‘임경업전’은 ‘임장군전’이라는 또 다른 이름과 함께 목판본, 활자본을 비롯하여 수십여 종의 필사본을 거느리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 ‘임경업전’이고 또한 임경업 장군이었던 것이다.
임경업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설화들도 우리문학에서는 쉬이 찾아낼 수 있다. 태백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한 나그네를 만나 신묘한 검술을 배웠다는 이야기, 군사들을 거느리고 연평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바다 속에서 담수를 건져 올려 식수로 썼다는 이야기, 음식이 떨어지자 가시나무를 베어 바다에 꽂아두고 거기에 걸린 조기 떼로 해결했다는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군의 면모는 서해안 일대 곳곳의 어촌마을에서 당집의 주신으로 좌정하고 있는 임경업장군신을 먼저 꼽아야 할 것 같다. 앞서 말한 연평도 일원을 비롯하여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의 곶창당제, 더 내려와 안면도 황도리의 황도당제 등 서해안 일대의 풍어제 혹은 당굿에서는 예외 없이 임경업장군신을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있다. 어부들은 풍어와 무사귀환,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임경업 장군의 숙원을 풀어주는 대가로 그의 권능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원칙만 합의하면 뭐합니까? 제발 이번 회담에선 우리 바다에서 꽃게를 다 쓸어 가는 중국 어선을 막을 대책 좀 세워달라고 해요.” 출항을 위해 연평도 선착장에 모여든 선원들이 남북장성급회담을 두고 터뜨린 불만의 목소리들이다. 서해교전이 있은 지 두어 해, 이제 남북이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방지하자고 목소리를 낮추며 가다듬는 사이 중국 어선들은 남북한 힘의 공백지대이자 꽃게의 황금어장인 북방한계선(NLL)을 타고 몰려와 조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벌써 한 십여 년 전이던가, 서해안 당제에서 임경업장군신을 섬기는 현상을 한 학술발표회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혼자 했었다. 서해 바다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쫓고 쫓기던 임경업 장군이 신이 된 것은 아마도 그곳을 무대로 벌이던 조선과 중국 양쪽 어부들의 어장(漁場) 다툼 때문이 아니었겠느냐 하고 말이다. 남북한 장군들의 회담에 쏠린 어부들의 탄성을 들으며 능력을 다 쓰지도 못하고 비운에 간 장군 임경업을 떠올리는 소치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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