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대행'의 파란(破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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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대행'의 파란(破卵)

  • 승인 2004-05-26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필자가 지금까지 쓴 예닐곱 개의 필명 중엔 '최명인'이 있다. 한데 명인(命仁)이 명인(名人)처럼 들려 주제넘게 쓰지 않는다. 적어도 달인(達人)이나 명인이라 불리려면 블루스와 록 기타의 게리 무어처럼 사람의 감성을 콕콕 찌를 만큼은 되어야 한다. 너나나나 남발하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표현은 막 사표가 수리된 고건 총리(오늘까지는 총리로 부른다) 정도면 붙여도 좋다.

그에게도 낚시론이 있다. 행정이 낚시와 같아 낚아챌 때는 적절한 타이밍과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말하자면 그의 낚시론이다. 각료 제청권을 마다하고 꺼내든 반기(反旗)가 낚시론의 연장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저 암울했던 80년 5월의 상황을 반추하게 한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그는 국보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지 않은 길, 퇴로 없는 길처럼 보였던 그 길이 최선의 길이었다. 전에는 협박에 가까운 군부의 회유가 있었고 이번엔 압박 비슷한 청와대의 삼고초려가 있었다. 하여튼 80년, 그 직후, 어느 정치학 교수는 최루탄 냄새 매캐한 강의실에서 침이 마르도록 친구 고건을 자랑하곤 했다.

내가 아는 '고건' 이미지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십팔번인 그 교수에게서 전이된 거나 다름없다. 친구가 잘됨을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栢悅)의 참뜻도 비로소 처음 깨우쳤다. 소나무가 무성한데 잣나무가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에게도 결함은 있다. 총리 지명 때는 '7대 불가사의'란 것도 떠돌았다.

인간적인 약점이야 그리스도나 석가모니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처신으로 헌법정신이 "시험에 들게 말게" 하는 덴 성공했다. 월요일자 본보 사설 '조폐공사의 파란운동'에 썼던 진정 알을 깬다는 '파란'(破卵)이 이게 아닐까 한다. 사실이지 지배적 문화의 서슬이 시퍼런 조직 안에서 난공불락의 제도나 관행의 벽을 허문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통일·문화관광·보건복지부에 한정된 '찔끔 개각'마저 다음달로 밀린 청와대로서는 마냥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내 눈엔 알껍데기를 깨는 진정성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총리의 제청을 그저 들러리라고 얕보는 쪽에서 허를 찔린 것은 당연지사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 그것만 먹는 광고가 나타내듯 중요한 것은 속(內)이다.

이같이 다수가 공유하는 핵심 가치(core value)의 잘못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고 총리는 떠났다. 본질은 법리적 논란을 떠나 있다. 편법을 묵인하고 일삼는 풍조가 더 문제다. 몇몇 장관자리를 흔들며 희망하는 걸 고르라니 국정이 무슨 "골라! 골라!"를 외치는 시장바닥인지 그저 황당하기만 하다. 그래놓고 밀리면 끝장이니 뒤통수 맞았느니 해서 아옹다옹 싸우니 가관이다.

장관자리가 그대들의 액세서리였나. 참여정부 인사시스템의 상징 코드는 스타일 구겼고 개각 시나리오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다. 오죽하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된 'blue rose', 그 불가능의 영역에 머물던 파란 장미까지 며칠 전 세상에 나왔는데, 각료 제청권 거부도 절대 있을 수 없는 파란 장미로 단정해버린 습관의 견고한 벽이 일을 망친 것이다.

'협상론' 책에 의거하면 청와대의 대처는 기본적인 협상 모형조차 충족시키지 못했고, 낚시에 비유하면 낚시터도, 낚싯대 크기도 잘못 고른 것 같다. 총리의 선택권을 순두부 백반을 먹느냐 국수를 먹느냐 하는 수준으로 취급한 데 항거해 계란을 깼을 것이다.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했다.

이왕 깨진 것이라면 계란 프라이용이 되지 말고 삐악삐악 살아 숨쉬는 병아리로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야겠다. 달인을 보내는 날,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날'이라는 조계종 법전 종정의 봉축 법어가 심상히 들리지 않는다. 꼭 오늘이 초파일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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