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아들이 잘못한 일에도 자신의 아들이 잘못한 것이라며 죽도록 두들겨 패야 하고, 아이는 맞아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아버지에게 맞아야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서울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설사를 하면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시작된다. 정부는 간첩들의 설사가 전염병 때문이라면서, 설사를 하는 사람들을 모두 간첩들과 접선한 용의자라고 발표하고 주위에 설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진신고 하도록 사회 분위기를 몰아간다.
이러한 분위기에 감염되어 있는 아버지는 지레 겁을 먹고 초등학생인 아들을 경찰서에 데려다 주게 되는 것이다. 아들은 전기고문을 받는다. 하반신 불수가 되어 돌아온다. 아버지는 자해를 하고 길에 나와 꺼억꺼억 울면서, “나도 청와대 이발사란 말이야” 외친다.
자신의 몸을 찢을 뿐 통곡 한번 속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꺽꺽거리고 마는 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항거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쌀집 주인은 간첩으로 발표된 지 사흘만에 처형되고 한 줌의 재로 돌아온다.
이 영화의 상상이 황당한가? 아니다. 60~70년대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말도 안 되는 조작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도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고문이었다. 재판은 고문에 의한 진술서를 받아들여 진행됐고, 대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이 나온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각에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세계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국제법률가협회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명명하고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했다. 우리나라 사법부는 이에 대해서 아직도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악법도 법이라고 외치고 있다.)
아들을 고치기 위해 전국의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다니면서 아들을 업고 다니는 아버지. 거리가 문제되지 않았고, 차가운 물길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고치는 것은 아버지의 헌신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고와 의식의 전환이다. 저격되고 아버지가 영구차에 그려진 초상화의 눈을 파서 불구의 아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그린다.
그리고 청와대의 새 주인에게 “각하 머리가 다 자라면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이발을 거부한다. 그리고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부대자루에 씌워진 채 집 앞에 던져진다.
이때는 이 아버지도 아들이다. 권력을 아버지로 알던 아들이다. 이 아들이 사악한 권력을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불구 상태가 해소된다. 영화는 이발사의 의식이 전환되었을 때 고문에 의해 불구가 된 아들의 다리가 낫게끔 한다. 그리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게 한다.
고문에 의해 불구가 된 아들은 결국 부당한 해악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했던, 그리하여 결국 그 해악을 더욱 키웠던 아버지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일어나서 외치지 못한 것만으로도 공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결과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자신에게,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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