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에 얹혀진 그의 소품문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한 인간의 됨됨이가 촉촉이 나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 만큼 그의 글은 잔잔하며, 그의 소품의 한 미덕을 만들어내고 있다.
두어 해 전 중국여행길에서 남경을 들렀을 때, 그리고 현무호(玄武湖) 호반에 위치한 어느 호텔을 찾아 여장을 풀었을 때, 나는 이 문인이 남겨 놓은 소품문 ‘남경(南京)’을 떠올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도착시각이 늦어져 그날의 나머지 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우리 일행은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가벼운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여행의 정취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국에 있는 도회의 야경은 그런 대로 볼 만했고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 현무호의 낮고 어두운 윤곽도 어느 만큼은 분간해낼 수 있었다.
“남경은 가볼 만한 곳이다”로 시작하는 주자청의 글 ‘남경’에는 현무호 외에도 진회하(秦淮河), 명효릉(明孝陵)과 석인석마(石人石馬), 중산릉(中山陵) 등 옛 금릉 땅이던 남경의 화려한 풍경 및 산재한 역사유적들이 특유의 차분한 어조에 실려 소개되어 있다.
진회하에 대해서는 그의 또 다른 소품문인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에 그 풍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거니와, 요즘 그곳 여행의 필수코스인 남경대학살기념관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글이 발표된 몇 해 뒤에 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대표작 ‘아버지의 뒷모습(背影)’의 배경이 되었던 남경역이었다.
조모상을 치른 뒤 북경대학으로 돌아가는 주자청에게 그때 마침 실직한 상태인 아버지는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남경역까지 따라나왔다. 괜찮다는 아들의 말에도 귤 꾸러미를 사주러 휘청휘청 철로를 건너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자청은 뜨거운 눈물을 목으로 넘긴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른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쳤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였지만 무엇보다 아버지한테 눈물자국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부자간의 쓸쓸한 정리가 흐르는 남경역이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뒤 서울의 학원가에 등록을 하고 짐꾸러미와 함께 서울발 열차를 타는 날이었을 것이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집을 나와 역 구내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대합실 안으로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집에서 자식을 배웅한 아버지는 다시 그 자식의 뒤를 쫓아와서 혼자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너를 믿는다. 그리고 너를 기다린다… 미동도 않고 밖을 응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눈에서 그런 말들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 나도 주자청처럼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현무호에서 걷더라도 오 분 거리밖에는 안 된다는 남경역을 나는 그 여행에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중산릉이나 명효릉 등 거창한 구경거리들로 짜여진 일정 속에서 남경역을 보고 싶다는 나의 그 작은 소망은 이해될 수도 없고 또 실현될 수도 없는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남경을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남경역을 꼭 찾아보리라. 아니 그보다 먼저, 스물 일곱 해 전의 서대전역 그 대합실을 찾아 기억을 뒤져서라도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사랑은 ‘지켜보는’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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