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은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우중충했다. 수 년 전. 믿을만한 지인(知人) ‘K’ 한테 빚보증을 서 주었다. K가 그 돈을 갚지않아 카드회사에서는 결국 나 한테 월급 차압을 했다.
처음 당하는 수모였다. 할 수 없이 원금이라도 받자며 K의 월급에 압류하고, 법원에서는 매월 배당액을 공탁받아 모은 돈을 1년에 한번씩 주는데 오늘이 그 돈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10여년 전. K와 나는 서로가 신뢰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수시로 찾아오는 그들 부부에게 시골에서 농사지어온 채소와 쌀을 승용차에 실어주며, 어렵게 사는 그들에게 용돈을 쥐어주기도 하는 등 우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은 변명도 없이 기어이 나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아내로부터 오는 원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빚보증 잘 서는 사람한테는 딸도 주지 말아라.”
‘빚과 보증’. 이는 우리 근대 경제생활사의 당면한 화두(話頭)요, 경제산물에 양면성을 지닌 필요악이다. 누구든지 남 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며 살다보면 힘이 들어 빚을 내는 것이다.
이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는 훗날 받을 것을 염려하여 믿을 만한 일정한 규모 이상의 재산과 신용을 지닌 사람의 보증을 세우라고 한다.
그러면 채무자는 가까운 지인을 찾고, 이때 빚보증 부탁을 받은 사람은 인지사정상 차마 거절을 못한다. ‘이 사람이 설마 나 한테 피해를 주랴?’ 하는 안도감에서 대부분의 가장들이 ‘우정과 의리’ 라는 미명(美名)아래 아내 몰래 도장을 꾹 찍어준다. 그러나 ‘설마?’ 가 사람잡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네가 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너를 믿고 사는 신용의 사회, 즐거운 일은 다 함께 즐거워하면 즐거움이 배가되고, 슬픈 일은 나누어 슬퍼하면 아픔이 덜 하는 우리 사회.” 이런 것이 모름지기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요, 훈훈한 우리의 삶 터일 것이다.
법원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왔다. 배가 고픈지 앞서가던 아내가 감자탕집 식당 간판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보 저어기 식당에 가서 감자탕이나 한 그릇 사먹어요.” “그러지이 뭐. 배 고픈데 잘 되었네.” 법원 앞 북적대는 식당에 들어선 아내는 습관처럼 식당 벽면에 붙은 차림표를 본다. 눈 여겨 보던 아내의 표정이 달라진다.
“감자탕은 안되겠어요? 간단하게 콩나물국밥이나 한 그릇해요.” “아니 뭐 그냥 . 감자탕으로… 먹지.” “뭐예욧, 우리가 여기 법원에 왜 왔어요? 저 돈이면 애들 며칠치 교통비예요?” 차림표를 보니 감자탕 2인분은 1만5000원이고, 콩나물국밥은 4000원이었다.
염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콩나물국 눈치밥을 먹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훌~ 훌~ 대충 먹고는 일어나 집으로 향하였다.
표정이 밝지 못한 아내의 옆 얼굴을 보며 슬쩍 말을 걸었다. “여보, 저 오늘진 태양도 내일 아침이면 희망봉 살갗을 힘차게 헤치며 장엄하게 떠 오르겠지.” “쳇, 뭐예욧. 태양, 희망, 말은 잘혀유…. 나은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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