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보면 내가 대륙에 왔다는 실감이 나서 감격스럽습니다.” “왜요?”
“한강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잖아요. 조용히 고여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강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대륙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나는 그때부터 무심코 보던 강을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과연 한강은 들여다보아서는 흐름의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있을 뿐.
얼마 전 한 중국인이 나에게 물었다.
“서울은 해안도시라면서요?”“네? 천만에요. 서울은 내륙도시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바다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인천 앞 바다까지 차로 간다면 1시간이상 가야 합니다. ”“그래요? 1시간 정도라… 그럼 해안가 아닌가요?”
나는 할말을 잠시 잊었었다.
인생은 조그만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샘물이 천을 이루고 강에서 합쳐져 바다로 들어가는 강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 대통령 링컨에게 한 측근이 ‘누가 당신을 뒤에서 욕합디다’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링컨이 말했다.“ 그럴테지. 인생은 긴 강과 같은 것이니 흐르다 보면 강물에 침 뱉는 사람도 있을 테고, 소변보는 사람도 있겠지. 안 그런가?”
대륙이나 대국은, 또 대인은 강의 흐름이 다르다.
조그만 바람이나, 물살이 휘젓는다하여 범람하거나 흐름을 바꾸는 법은 없다. 침을 뱉건 오물을 뒤집어쓰건 그저 안고 흘러갈 뿐, 요동이 흔치않고, 변덕이 자주 없다.
우리나라는 대륙인가? 우리 국민은 대국민인가? 우리는 대인인가?
나는 지난 4·15 총선을 보면서 진지하게 자문을 해보았다.
국가장래의 지도자를 뽑는 진중하고 진중해야 할 선택에, 우리는 말 한마디에 요동치고, 작은 움직임에 우왕좌왕하며, 바늘에 찔려도 불에 맞은 양 경망스럽지는 않았던가?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솔깃거리며, 모함과 모략에 쉽게 속고,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며 휩쓸리지는 않았던가?
사람을 판단할 때 늘 그의 항심(恒心)을 보아야 할진대, 우리는 타인의 항심을 읽기보다는 그 사람의 표상(表象)만을 보고 판단하지는 않았던가?
자그마한 비판이나, 잠깐동안 뿐일 오해나 구설수에도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며 동요하지는 않았던가?
또한 이를 바로 잡기는커녕 이를 조장하고 있는 다수의 이 나라 각계의 지도층과 여론 형성층과 언론기관이 실망스러웠다.
아! 정말 우리는 대인답게, 또 대국답게 무겁고 속 깊게 처신하고 있는 것인가?
4·15 총선은 끝났다. 이제 늘 흐르되 속으로 흐르고, 얕아 보이되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을 보면서, 나는 총선을 치른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금번 총선과정에서 수없이 겪었을 수많은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내가 어려울 때마다 떠올렸던 링컨의 대답으로 위로를 드리며, 공직자로서 비난과 오해를 살 때마다 읊었던 도종환 시인의 시를 선사하고자 한다.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우리는 간다./가장 더러운 것을 싸안고/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 보다/낮은 곳을 택하여/우리는 흐른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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