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신문연재소설은 자본주의사회가 낳은 대중소설의 시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발자크의 경우 대중소설이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일거양득의 성과를 거뒀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쓴 대중소설은 인기와 돈벌이는 보장해주었어도 그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작가들이 대중소설을 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지요. 먹고사는 문제에만 오로지 매달리면 그는 대중작가 내지는 스토리텔러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삼류작가이지요. 그러나 작가에게도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선 생활이 곤란한 노릇이고, 자연히 예술도 문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작가들도 인기에 영합한 대중소설을 씁니다. 우리는 작가가 대중소설을 썼다고 해서 그를 매도하거나 그의 작품 전반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품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듯이 대학은 교육을 통해 그 역할과 가치를 추구합니다. 교육이 지고지순하듯이 예술성도 지고지순한 것입니다. 작가가 예술성을 포기할 수 없듯이 대학도 역시 교육의 본질 가운데 으뜸인 순수·기초학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먹고사는 문제와 작품성을 위해 지혜로운 글쓰기의 이른바 ‘황금분할’을 하며 본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대학은 분배가 아닌 선택을 합니다. 이른바 경제우위를 점하는 학문과 학과는 우대를 받지만, 인기가 없어 자생력이 떨어지는 순수 기초 학문이나 이와 관련된 학과는 홀대를 받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지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학이 본연의 모습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이른바 오늘날 대학은 스스로의 자구를 위해 경영논리를 앞다퉈 이야기하고 있으나, 현실은 경영논리에 입각했다기보다 인기의 논리에 편승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해당 학문의 연구와 교육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보다 해당 학문에 학생이 오느냐 안 오느냐가 그 학문의 존폐사유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에 의해 연구하고 가르칠 인기 있는 학문 영역을 만드는 곳이 되는 셈입니다. 바꿔 말해 작가가 작품성이고 예술성이고 간에 독자들의 요구와 흥미에 의존한 작품을 쓴다는 말이지요.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대학은 교육하는 고유 기능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치 다양한 개체들이 조화롭게 모여 세상을 이루듯 교육 또한 여러 분야와 전공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업들이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생산직과 영업직만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연구직이 우선 당장 이윤과 무관하다고 해서 이를 버리는 기업은 없습니다. 이를 소홀히 하는 기업을 우리는 미래에 대한 투자가 없고 공익성을 저버려 비전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합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지금 생존과 경영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연구개발직을 도태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대학에도 이치와 순리, 그리고 지혜를 보는 눈이 있다고 한다면, 작가들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대학은 교육기관입니다. 따라서 대학을 이끄는 원동력은 교육논리이지 경제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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