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세이] ‘불판’을 둘러싼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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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에세이] ‘불판’을 둘러싼 생각들

  • 승인 2004-04-28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툭하면 갈아치우겠다는 세태에서 옛날 중국어 선생님에게서 들은 송루각(宋樓閣) 얘기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대대로 가업을 전승한 그 보신탕집은 400년 동안 개고기 삶는 솥을 한번도 씻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씻어낼 시간이 없었다고도 하고 일부러 안 씻는다고도 했다. 그만치 전통을 중시한다는 교훈쯤으로 새겨두고 있다.

전통과 조화를 생각함에 있어 ‘노회찬 어록’을 들추지 않을 수 없다. 50년 구워먹은 삼겹살 불판을 바꾸자며 걸쭉한 입담을 인정받은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그는 이제 정당들이 뼈를 깎는 노력은 하지 않고 때만 밀고 있다며 일침을 가하고 있다. 멸치 뼈 같다 할지라도 뼈 있는 말들이다.

이른바 그가 말한 불판 교체론을 나는 좋은 의미의 환골탈태로 해석하려 한다. 뼈를 바꾸는 환골법과 태를 빼내는 탈태법으로 몰라보게 변한 모습이어야 하는 우리 정치판은 그러기에 때 빼고 광내는 정도로는 변화를 꾀하지 못한다. 인물이 바뀌었다고 판 갈이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갑작스레 몸집이 비대해져 뱃살이 늘어난 열린우리당부터 좌표 설정이라든지 정체성 확립을 놓고 고심참담해야 할 처지다. 27일 당선자 워크숍에서 송영길 의원은 “정당은 없고 여야만 있는 후진 정치는 벗어나야 한다”며 그에 걸맞은 ‘시대정신’을 주장했다. 나는 여기에 ‘성숙한’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미숙하지 않은 시대정신, 성숙한 시대정신을 요구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전체를 보면 초록이 동색인 것 같으나 보수성향이 짙은 당권파 중심의 전문가그룹, 진보성향의 개혁그룹, 친노(親盧) 직계그룹으로 대별되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나름대로 복잡한 정당이 열린우리당이다. 불판으로 비유하면 그냥 굽는 게 아니고 육질을 조절하고 부위별로 굽는 불판이라도 필요할 것 같다(시중에 실제 그런 ‘진짜 불판’이 나왔다).
경인일보 기자 이력이 있는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관훈클럽 세미나에 갔다 오는 길에 목포발 서울행 고속철 안에서 이런 말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큰돈을 땄으니 도박에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는 조언이었다. 그의 화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처자와 집문서까지 몽땅 판돈으로 건 지독한 노름꾼이다.

도박을 했건 길가다 지갑을 주웠건 과거는 묻지 않기로 한다. 문제는 현재이고 미래이며 그 정체성이다.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빌리겠지만 북한 열차참사와 관련해 동포 돕기에 나서는 것은 아무튼 보기에 좋다. 미리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우측 깜빡이를 켜고 좌측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그 반대의 경우나 위험천만하다는 점이다.

진보나 발전은 때로 이질적인 것들의 다툼 속에서 온다. 외눈박이가 아닌 좌측 깜빡이와 우측 깜빡이가 공존하는, 그리하여 좌우회전과 전진-후진-중립이 예측 가능한 정당, 새까맣게 닳은 삼겹살 판을 가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얹어주는 고기도 달라지는 지속 가능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 갈린 정치판에 신선한 정책이 올라와야지 과거처럼 상하거나 썩은 고기를 올려놓으면 두고봐라, 국민이 퇴짜놓게 된다.

재건축과 리모델링은 다르다.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하고 50년 묵은 불판을 쓱쓱 닦아만 놓은 것하고는 절대 같을 수 없다. 17대에는 그처럼 17대다운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 소련의 볼셰비키, 중국의 문화혁명 때 대의가 있었듯이 바로 지금도 불판 갈이의 대의와 명분이 있다. 어떤 의미로 17대라는 정치적 해방공간은 다용도 구이 불판이다.

정치가 창날이면 경제나 사회, 문화는 창 자루다. 정치개혁 없이는 모든 개혁, 또 언론의 개혁은 도로아미타불이다. 신장개업 집일수록 손님 좀 들었다고 거드름피우지 말고 적당한 시점에 불판을 알아서 척척 갈아야 한다. 불판 얘기를 입에 올리다보니 해물칼국수를 먹고 나서 자글자글 비벼먹던 볶음밥 생각이 난다. 국민들은 그런 볶음밥 같은 고소한 정치를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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