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나 종족보존이 모두 싸움으로 지속된다.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싸움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지만 그 가운데 가능한 피해야 할 것은 ‘못된 싸움’이다.
싸움패의 싸움이 그 예다. 싸움패는 오직 싸움을 위해 싸움판을 만든다. 싸움을 즐기는 것이다. 싸움이 있는 한 사는 보람이 있지만 싸움이 없으면 살맛이 없다. 그래서 싸움판을 만들고 싸움질을 끝내려 않는다.
찾는 싸움판으로는 부족하다. 이골이 난 싸움패는 멀쩡한 곳에서도 싸움판을 만든다. 편을 가르고 나와 너, 우리와 적을 만들고 없던 성질을 돋운다. 싸움패의 싸움은 껍질의 싸움, 이권의 싸움이다.
내면의 싸움, 가치의 싸움, 진리의 싸움이 되지 못한다. 이들 싸움패만으로 무리를 이룰 때 못된 무리가 된다. 그렇게 되면 못된 싸움판이 더욱 증폭된다. 못된 무리들 가운데 조심해야 할 것은 ‘증식의 무리’와 ‘전투의 무리’이다.
‘전투의 무리’는 제 2의 적을 만들어 놓고 싸움을 벌일 때 생겨난다. 제 2의 적이 소멸되면 제 3의 적을 만든다. 고약한 일은 상대만으로 적을 만들지 못할 때는 자신이 속한 무리들을 둘로 나누고 적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증식의 무리’는 한없이 불어나는 자체증대의 충동과 언제나 더 팽창하려는 권력의 본성에서 생긴다. 인간은 특유의 변신을 통해 언제나 실제보다 많아지고 더 커지기를 원한다.
권력의 먹이를 삼키려는 피비린내 나는 교활함이 ‘증식의 무리’의 내부에 도사린다. 이런 무리일 수록 결속력이 특성이다. 구체적인 이해관계로 묶여 있는 탓이다.
우리가 해야할 싸움은 잘된 싸움이다. 아프리카 사막에 사는 ‘부시맨’족은 장난삼아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냥감을 먹으려고 잡는 것이지 즐기려고 잡지 않는다. 그들은 사냥감을 숭배하고 존중한다. 짐승이 화살을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 가면, 그들도 금제(禁制)를 지킨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리고 의례(儀禮)를 올린다. 이 의례 행위는 동물이 목숨까지 버려 먹을 것을 준 것을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이다. 싸움은 이러한 이해와 아픔이 함께 할 때 참된 형태가 된다.
싸움이 생존이 아니라 유희가 되어버릴 때 싸움은 타락하는 것이다. ‘고싸움’은 중요 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된 우리의 민속놀이다. 마을 전체가 벌판에 모여 몇 날 며칠을 두고 싸움을 벌인다.
서로 단결하는 이유는, 두 패로 갈라져 적으로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됨을 위해서이다.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나가는 싸움이지만 중요한 것은 싸움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싸움의 과정에 있고 성실성에 있다. ‘고싸움’은 한마을의 동질감과 결속을 싸움의 형태로 얻어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잘된 싸움은 상대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균형, 하나의 조화라는 사실이다.
잘된 싸움은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지한 아픔으로 시작해야 하고, 그 끝은 화합으로 엮어져야 한다. 세상에는 못된 싸움도 있고, 잘된 싸움도 있다.
기묘한 것은 대개 잘난 사람들이 못된 싸움을 하고 못난 사람들이 잘된 싸움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혹 잘난 사람들의 못된 싸움판에 끼어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의 못된 싸움판을 거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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