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의 동상. |
‘강의가 일찍 끝날 때, 선생님은 종료시간까지 자연풍경이나 뉴스 슬라이드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는 러일전쟁 중이었고 그래서 전쟁에 관한 영화 슬라이드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고 있던 영화에 오랜만에 중국인 몇 명이 나왔다. 그들 중 한 명은 묶여 있었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체격이 건장했지만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손이 묶인 사람은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한 자로 본보기로서 공개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될 참이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쿄를 향해 떠났다.
이 영화를 본 뒤부터 의학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소한 후진국 국민은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이처럼 무의미한 본보기의 대상이나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병으로 많이 죽어간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당시 나는 문학이야말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문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본문 ‘루쉰의 고백’ 중에서
소설집 ‘납함’의 ‘자서’에서 밝힌 이 루쉰의 체험은 지금까지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문학에 투신하게 된 동기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해석되어왔고, 수많은 중국문학 비평가들은 루쉰의 이 고백에 감동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비평가들의 그런 문학적인 해석에는 무언가 간과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레이 초우는 지금껏 절대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이 루쉰의 고백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루쉰이 받은 시각적 충격에 주목한다.
루쉰은 자기나 자기의 동포들이 세계의 눈에는 구경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국민의식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강력한 미디어가 전통적인 문학의 역할을 빼앗고 그것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변혁기,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통문화의 기호를 대체하는 때 등장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이다. 여기서 ‘원시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권위를 가진 ‘기원’ 혹은 ‘낙후된 것’ 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의미. 중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을 의미하고 있기도 한다.
이로서 저자는 특히 중국영화 안에서의 원시적인 것이 머무르는 장소로 ‘여성’ ‘자연’ ‘어린이’에 주목하고 1930년대의 무성영화에서부터 1960년대 마오쩌둥과 홍위병, 1980년대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 등의 영화를 그 분석대상으로 놓는다.
관객 천만 시대의 우리의 영화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는 저예산 영화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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